2020년 새해도 왔고 다시금 독서 기록을 해보려고 한다.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못했으니까.
모두 다 리뷰하기는 힘들어도, 남기고 싶은 말 위주로 정리해본다.
1.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박경리 유고시집. 39편의 시가 담겨있다. '작가 박경리'보다 '인간 박경리'가 느껴져서 좋았다. 특히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시들은 마치 살아보지 않은 그 시대를 겪어보는 느낌이었달까. 어쩌면 일기같기도 한 시들이 솔직하면서도 담백하다. 시 한편을 읽어도 하나의 이야기를 읽은 듯한게, 소설가의 흔적(?)일까.
'어머니'란 시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화자가 느끼는 슬픔과 허무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인 '엄마 없는 세상'. 엄마가 돌아가신 사실을 느끼는건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 한 아픔인거다.
2. 술라 - 토니 모리슨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장편소설. 1973년 발표된 두번째 소설이다. 미국 사회의 인종문제와 여성문제가 녹아 있다. 대표작인 비러브드(Beloved)를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하다가 같이 사서 어쩌다 먼저 읽었다.(더 얇아서 손이 먼저 갔다)
"선한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어."
술라가 넬에게 하는 말이다. 아무도 선과 악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듯이. 요즘 들어 더욱 와닿는 말이다. 세상에 너무 많은 것들이 가변적이다. '절대적'인 건 드물다. 존경하던 위인이 알고보면 '천하의 xx'일수도 있고. 참 잘나가던 정치인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고. 왜 이런말도 있지 않나. '회사에서 영원한 적은 없다'.
일을 할때도 조금 미숙하고 서툰 사람보다 일하기 힘든 사람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다. 제프 베조스가 사람을 채용할때 보는 가장 중요한 3가지는 "1.나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 (배울게 있는 사람) 2. 많이 듣고, 자신의 신념도 바꿀 수 있는 사람(사람이 항상 옳지는 않다.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할지라도) 3. 조금 튀더라도, 반항할 줄 하는 '슈퍼스타' (현 상황에 의문을 가지고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 이라고 한다. 특히나 2번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https://www.cnbc.com/2020/02/04/jeff-bezos-looks-for-these-traits-when-hiring-at-amazon.html
3. 사랑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 -돌리 앨더튼
영국의 젊은 여성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사랑에 대한 책. 마치 친구의 일기장을 훔쳐 보는 듯, 저널리스트인 작가가 재밌게 풀어놓은 이야기들을 술술 읽게 된다. 대륙건너 바다건너 사는 사람이지만, 찰떡같이 공감할 내용도 한둘이 아니다. 사람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영화같은 해피앤딩도, 신데렐라 스토리도 아니고 그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실 사랑 백서'랄까. 사실 '사랑'이라 하고 있지만 연애사는 '도구'일 뿐 한 여자의, 한 인간의 '어른으로의 성장기'다. 중심 소재로 '연애'를 꼽은건 어쩌면 우리가 20대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연애이기 때문이 아닐까. '연애'를 중심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니까. 그런데 지은이는 그 '연애'가 갈수록 시시하고, '연애'로 대변되는 인간 관계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 사실 중요한건 '연애' 그 자체도 아니고, '그 사람'도 아니고, 남은 건 결국 '나'인 점을 깨달아간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성숙한 20대를 지나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 현실을 깨달으면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장이 뿌듯하기도 한. 특히 이 책이 잘 담은 부분은 '혼란'이다. '앞 숫자가 달라지는' 서른을 향해가면서 느끼는 혼란과 변화를 여지없이 담고 있달까.지은이는 마치 '서른'이 되면 '큰일 날 것 같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랬고, 20대도 좋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못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마트 봉지를 잔뜩 들고 캠던 거리를 걷다가 남의 집 현관 앞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한 건 20대의 인생도, 20대라는 정체성도 아니다. 내가 그리워한 건 시간 부자라는 느낌, 어마어마하게 선택지가 많다는 느낌이다. 영영 무한정한 시간의 주인이던 10대와 20대에 느꼈던 기분을 영원히 목 놓아 그리워할 것이다.
"내 청춘이 15분 남았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게 굴지 마, 별거 아냐." 소피가 달랬다.
"새로운 10년이 펼쳐지는 들판으로 새로 내달리는 거라니까. 얼마나 신나!" 로렌이 말했다.
옛 친구에게 하듯 지난 10년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내가 웃자라 드디어 맞지 않게 된 세월, 그럼에도 영원히 기억될 세월. 제멋대로 행동하고 무모하게 비틀거리며 방랑하고 뾰족하게 반항하던 세월. 내가 노를 저어가던 세월, 20대여 안녕.
4.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 - 스칼릿 커티스 외
이 책은 UN 여성 자선 단체인 걸업(Girl-up)과 협업으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스칼릿 커티스가 기획한 책이다. 배우, 여성 운동가, 작가, 기자, 사업가 등 각국의 다양한 여성들이 보내 온 '여성으로의 삶'에 대한 짧은 글들을 모았다. "한 여성의 이야기는 모든 여성의 이야기다"란 모토 아래 각 여성들 개인의 생각과 삶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좋은 점은 "완벽한 페미니즘도, 페미니스트도 없다"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조건 어때야 하고, 너희는 어때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여성들이라면 공감할테고, 안도할 것이고, 위로받을 것이다. 남성이라면 깨닫고, 이해하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를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는 것, 이거 하나만 얻으면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여성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온전한 인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다. -Alicia Garza (활동가,작가)
얼마 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아메리카나'(Miss Americana, 2020)를 봤다. 미국의 팝스타 테일러스위프트를 다룬 다큐로, 작품 설명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담았다고 했다. 다큐에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테일러, 성추행 사건을 겪으며 힘들었던 테일러 등 '슈퍼스타'로 화려하기만 한 그녀의 조금은 다른 일상을 보여준다.
https://www.netflix.com/title/81028336?s=i&trkid=13747225
하지만 다큐 속 테일러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그게 그녀의 모습이고, 성장하는 과정이고, 지금의 그녀 자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했던', '보지 않으려 했던' 점일 뿐. 사람들은 예쁘고 상냥한 백인 소녀는 그저 사랑에 대해 노래하길 바랬다. 소녀는 '굿 걸(good girl)'이 되라고 들으며 자랐다.
자기 분야에서 정점의 커리어를 찍은. '이보다 더 잘나갈 수 없는'. 그렇게 완벽한 (사회적 통념에 따르면) 외모를 가진 젊은 스타조차, 배가 조금 나와보이는 사진이 찍히면 신경이 쓰이고 속상하다. 그녀조차 '미디어가 부추기는 완벽한 몸매'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재력과 지위가 있는 그녀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성추행을 당했지만, 증인이 여러명 있지만, 재판 과정이 힘들기만 하다. 이러니 증인도 목격자도 없는 성추행과 강간 사건은 대체 누가 믿어줄까요?라고 묻는다. 정치적인 목소리를 줄곧 내지 않았지만, 이제는 스토커 방지법 등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적극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젊은 세대의 투표를 독려하는 내는 젊은 여자 스타. '슈퍼스타'인 그녀는 동시에 또 한명의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때다.
이제 우리가 세상을 바꾸어야 할 때다. - Alison Sudol (싱어송라이터, 배우)
5. 사업을 한다는 것 - 레이 크록
베스트셀러 선반에 오래 올라 있던 책. 사놓은 건 작년이지만 올해 읽었다. 말 그대로 '사업을 한다는 것'이 뭔지 알려준다. 지은이 레이크록은 전설적인 미국의 사업가로 맥도날드를 탄생시킨 사람이다. 놀라운 점은, 이 사람이 전 세계 프랜차이즈 사업의 원형이 된 맥도날드를 꾸려나갈 때가 무려 쉰두 살(1954년)때다. 젊을때 종이컵을 팔면서 겪은 영업사원 경험을 십분 발휘해 새로운 인생을 남들은 은퇴를 할 때 시작한 셈이다. 제 1장의 제목처럼,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를 몸소 보여줬달까.
책을 읽으면서 사업을 시작하는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책 속에서 레이크록은 "우리가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첫 5년 동안의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혈압이 오른다. 막막한 상황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직원, 재무, 아이템, 비전, 목표, 회계, 부동산, 매장 위생, 마케팅 ... 사업을 한다는 것은 이 수많은 항목들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여러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결국 성공적인 사업을 꾸려나가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게 '비전'이 아닌가 싶다. '가장 맛있는 햄버거를 전 세계에 똑같이 제공하는 것"이 맥도날드 창업 이유이자 궁극적 목표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맥도날드가 '맥도날드'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책 내용 중 동의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프레드 터너라는 초기 직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아내 패티 터너가 남편의 성공에 큰 몫을 했다고, 훌륭한 내조를 했다고 칭찬한다. 그는 남편과 아내로 이루어진 팀의 경우에 남편이 보통 운영과 관리를 맡고 아내가 회계와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상호 이익 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나는 경영자의 아내가 남편의 일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 어떤 일이든 하나보다는 둘이 머리를 맞대는 편이 낫다."고 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도 있듯이 메시지는 맞는 말이지만. '경영자의 아내'란 말에서 오는 '경영자=남자(남편)'이라는 공식은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다. (물론 레이크록이 1902년생의 '옛날 사람'이란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오늘날엔 훌륭한 여성 대표들이 많고, 오히려 뒤에서 '내조'를 하는 남편들도 많다. 또 동성 커플 등 '부부'의 형태가 '남편-아내'인 공식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 아닌가?
6. 예언자 - 칼릴 지브란
너무 유명한 책.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고전 중 고전. 오래 전에 읽은 적은 있는데, 다시 꺼내 본 기억은 없던 책이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Kahlil Gibran's The Prophet, 2014)"란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읽었다. 영화는 책 예언자 내의 시를 삽화로 꾸려낸 애니메이션 영화다. 시의 내용이 가벼운 건 아니지만, 가볍게 보기 좋다.
7.로마법 수업 - 한동일
지은이 한동일은 한국인 최조,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다. 결혼과 비혼, 돈과 계급, 여성문제, 낙태와 성매매, 범죄 등 인간사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문제들을 로마법을 통해 논한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점은 그 옛날 로마법이 오히려 지금의 사법 판결들보다 합리적(주관적인 합리성일까)이라고 느끼기도 했다는 점이다.
지은이가 전하고 싶은 말을 딱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Homines nos esse meminerimus.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