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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ung May 04. 2022

15. 못할 짓

 

 4월 마지막 주말에 나는 다행히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마침 내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담당의는 법적 보호자인 내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시한부의 보호자로 의사를 만나는 일은 항상 사람을 초연하게 만든다. 아무런 확신도, 자신도 없는 말들은 내 귀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떨어진다.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실낱같은 기대감도 가지지 않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내가 싫을 뿐이다.


 엄마는 치료원에서 영양제를 맞고, 소변줄을 차고 누워있었다. 두 눈과 손은 계속 허공을 맴돌았고, 나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말라버린 손을 부여잡고 인사를 했지만, 뿌리치시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동생이 왔을 때까지만 해도 의식은 있었다. 내가 너무 늦었다. 나는 엄마의 어깨를 부여잡고 침대 난간에 머리를 처박고 흐느꼈고, 엄마는 내 손을 잡아 뜯으려고 했다. 너무너무 아팠지만 난 차마 내 손을 치워드리지 못했다.


  

 엄마는 한결같이 병원을 싫어하고 불필요한 치료를 싫어했다. 연명치료 의향서에도 거부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나는 의사에게 영양제 투여를 중단해 달라고 했다. 콧줄을 차고 식사를 하시는 분들과 가슴에 영양제 수액을 달고 있는 게 내 눈에는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당의는 제거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 잔인하게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굶겨 죽이는 것과 같았다. 엄마는 다른 말기 암환자와 다르게 뇌 기능이 멈춰 의사 표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임의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무 몰상식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내 눈에 엄마는 본인이 항상 말씀하시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가장 기본적인, 수액만 취급해준다고 이야기 해준 병원으로. 이 또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엄마에겐 할 짓이 아닐 것이다. 그저, 엄마라면 내 생각과 같기만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다.



 이와는 별개로 나는 바깥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내면의 방어기제 같은 행동과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게 된다. 가끔은 스스로가 싫어지기도 한다. 그런 일상을 다시금 어둠으로 끌고 가는 일은 엄마의 안부를 묻는 전화이다. 담담하고 굳게 버티려고 노력하는 우리 가족과 다르게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심지어는 종교나, 말도 안 되는 방법들로 엄마를 낫게 하자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중 한 분이 내게, 지금 힘든 건 미래에 행복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15년 전, 아버지의 장례에서 얼굴도 몰랐던 어떤 분이 내게 다가와 아빠의 부재가 널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니 받아들이라고 했다. 지랄.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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