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5 화요일 한국니토옵티칼 평택 공장~진위역 17km
19일 차 : 2월 25일 화요일 한국니토옵티칼 평택 공장~진위역 17km 100명
다시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왔다. 그믐을 향해 뜬 가느다랗게 휜 달이 지구와 부쩍 가까웠다. 기차에 탄 나는 산과 건물을 사이에 두고 달과 숨바꼭질을 하며 달렸다. 무언가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달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고 나 역시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옵티칼 노조에게 희망 뚜벅이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7시 50분, 평택역에 도착했다. 역전김밥집에서 무취한 기름에 번질거리는 김밥을 한 개씩 느린 속도로 꼭꼭 씹어먹으며 역내를 부지런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제각각 목적이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집도 직장도 아는 사람도 없는 평택역에서 단지 희망 뚜벅이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나.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일 한 시간 후에 대해서.
슬슬 평택역 서부 광장으로 나가보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야 노조 사무장 자동차를 타고 한국니토옵티칼 공장까지 왔다. 호야는 노조 규모가 작지만, 바로 맞은편 공장이라 든든했다.
이날, 그동안 참가일 전날과 당일에 꼼꼼하게 일정과 주의 사항과 평등약속을 문자로 알려주는 하은이란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지난가을엔 참가신청서를 쓰지 않고 걸어서인지 몰랐는데, 박문진의 문자보다 먼저 도착한 숨이차의 알림으로 참가신청서를 쓰고 걷게 된 이번 희망 뚜벅이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신속하고 조직적인 안내였다. 차편이든 도시락이든 질문하면 즉각 오는 응답에 홍보담당자 누군가가 걷지 않고 따로 사무실에서 연락망만 전담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은은 늘 희망 뚜벅이와 함께 걷고 있던 또 다른 뚜벅이로 기록담당자였다.
공장 앞 농성 천막에서는 금속노조 김혜란 조직국장이 밤샘하고 나와 있었다. 그동안도 연대했지만, 희망 뚜벅이 이후 고공 농성자 제외 다섯 명뿐인 옵티칼 조합원이 천막 농성을 못 하자 여러 곳에서 분담하고 있었다. 그이로부터 전날인 24일 당진 현대제철 직장 폐쇄소식을 들었다.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노사갈등과 투쟁. 우리 모두의 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출발 직전에 박문진은 얼굴이 따갑다고 했다. 겨울 자외선 19일이면 피부를 상하게 할 것이다. 서둘러 자외선 차단제와 바셀린을 발라주는 사이 말벌 동지들은 평택 공장 앞에 분필로 표어를 쓰고 있었다.
70여 명이 출발하는데 삼선 슬리퍼를 신은 말벌 동지가 있었다. 하나뿐인 운동화가 찢어졌다고 했다. 내 운동화랑 바꿔 신자고 해도 슬리퍼가 편하다고 했다.
희망 뚜벅이는 한 번 선두를 놓치면 웬만해선 따라잡기가 힘들다. 뚜벅이 사이에선 희망 축지법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쳐지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중간에서 걸은 덕분에 첫 뚜벅이인 마사회 과천지회장과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과 일정 구간을 함께했다. 함께 걸으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점심시간에 시래기 김밥이 나눠졌는데 매우 별미였다. 희망 뚜벅이들에게 맛있는 김밥을 먹이기 위해 40분 걸리는 배달을 감행한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에게 감사를.
다시 걸었다. 잠시 신호 대기 중 장 작가와 쌍용자동차 동지가 할아버지의 보행을 돕고 있었다. 가끔 인간이 아름답다거나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그랬다.
한참을 걷다 쎄무 슬리퍼를 신은 말벌 동지도 등장했다. 그이는 도착 지점에 다다를 즈음 아예 슬리퍼를 양손에 끼고 양말 뚜벅이를 감행했다. 슬리퍼로 17km라니 젊음이 아니고선 상상할 수 없는 걸음이었다.
이날은 세월호 참사 임경빈 엄마 전인숙 님이 함께 걸었는데, 이분은 경빈이 휴대전화기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다. 아들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경빈 엄마를 촬영하고 있는데 장영식 사진작가가 오셔서 찍어달라고 하셨다. 대선배 작가님이 나에게 사진을? 떨려서 셔터와 조리개를 맞추는 게 더 어려웠다.
앞에 가던 김진숙 동지가 이지영 사무장의 어깨를 감싸 안은 모습이 보였다.
동지란 어깨를 잡아주는 사람. 김진숙이 그러했다.
그리고 동지란 함께 걷는 사람. 말벌들이 그러했다.
평택이라 미군 기지 때문에 전투기 소음으로 시끄러웠지만, 젊고 생동감 넘치는 기운 덕분에 도착지인 진위역까지 힘들지 않게 다다랐다. 70여 명은 어느새 100여 명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양말 동지가 고공 농성자 중 한 명과 동갑이고 그날이 생일임을 알았다. 그이가 시 한 구절 같은 말을 했다.
“(상략) 옥상에서 지상까지 내려오는 가장 짧은 거리를 지금 가장 늦게 내려올 수밖에 없는 저 동지를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조금 힘든 게 아무 힘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끝까지 완주해야겠다, 차를 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내려오시는 날까지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 발언에서 김진숙은 먼저 박문진이 필리핀 봉사활동 당시 8개월을 같이 살았던 강아지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그날 박문진의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힘내라는 박수를 부탁했다.
아, 그래서 아침에 얼굴이 따가웠던 거였다. 눈물 자국 때문에.
김진숙이 발언을 이어갔다.
“우리 오늘은 유난히 비정규직 동지들이 많이 오신 것 같은데요. 우리 건강보험공단 동지들 제가 건강보험공단 동지들이나 도로공사 동지들한테는 되게 미안한 게 한창 투쟁하실 때 제가 암이 재발하고 그다음에 직장에 문제가 생겨서 직장을 잘라내고 난소를 잘라내고 난관을 잘라내고 담낭을 잘라내고 1년에 한 번씩 뭔가를 잘라내서 제 몸의 장기는 지금 다섯 개가 없습니다. 근데 너무 신기하지. 여러분들보다 훨씬 잘 걷습니다. 하나씩 잘라내세요. (웃음)
하여튼 그때 제가 우리 도로공사 동지들이랑 건강 공단 공직을 주장하는데 못 가봐서 너무 미안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규직들은 영원히 자신이 정규직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현대중공업에서 몇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아들이 결혼해서 아이가 셋인데도 취업이 잘 안 됐데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 공장에 와서 하청이라도 일해라. 그럼 언젠가 정규직이 되겠지. 아들이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에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일하다가 혼자 일을 했는데 목에 호스가 감긴 채 시신으로 발견이 됐어요. 사측에서는 자살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근데 이 아버지는 도저히 아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정문 앞에서 8개월을 일인 시위를 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결과는.
아들의 죽음에 진상이 밝혀지고, 회사가 사과하고, 보상이 이루어지고 이게 순서입니다. 그죠? 근데 아버지마저 잘렸습니다. 그 아버지가 지금 택시 운전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정규직의 일자리가 기본처럼 돼버렸는데 (중략) 저는 비정규직 문제를 없애는 길은 정규직들이 투쟁하는 길이라고 봐요. 근데 그걸 이미 우리 정규직 노동자들은 못 합니다. 왜? 정규직의 일자리는 기득권이 돼버렸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놓치면 안 되는 일자리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민주노총의 주인은 장래 희망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돼야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면 정규직들은 이미 초심을 다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 힘쓰시더라도 힘내서 투쟁해서 정규직이 되는 게 아니라 노동 해방의 세상으로 갑시다. 투쟁!”
마지막으로 고공의 두 동지들과 전화 연결을 했다. 그들은 말벌 멜로디언 동지와 그리고 맘마 동지의 방문으로 아직 2만 보를 못 채웠지만, 연대 방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고 했다. 둘의 행복이 전화 너머 그들을 위해 걷는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이날 희망 뚜벅이들은 양말 동지가 가져온 생일떡을 받아 들고 흐뭇하게 헤어졌다.
진위역에서 공공운수노조 김영애 경기본부장과 나란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친한 지인의 모친상 부고를 받았다. 아웃도어 옷차림에 땀 범벅된 몰골로 서울의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갔다.
죽음은 별안간 찾아오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남은 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미루지 말고 따지지 말고 바로 가주는 것. 가서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연대고 우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