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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길뜬별

지리산 순례길 3

20250603 거림마을~세석평전~촛대봉~세석대피소~거림마을 14km

by 일곱째별


눈을 뜨니 새벽 6시 19분.

늦었다.

서둘러 한 시간 후에 집을 나섰다.


9시 39분. 경상남도 산청에 들어섰는데 숨이 헉 멎었다. 초록산에 불에 탄 나무 자국이 흉측한 고동색으로 번져있었다. 시천천 양쪽으로 불탄 면적이 꽤 넓었다. 지난 3월의 산불 현장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10시. 거림마을 도착.

15분. 예약해 둔 거림탐방지원센터를 통과했다.

200년 넘은 거림송(巨林松)을 지나 바닥에 떨어진 하얗고 작은 때죽나무 꽃잎들을 지나갔다.

왼쪽으로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폭포도 있었다.


젖은 산

밤새 비가 왔는지 산은 젖어있었다.


불탄 숲

10시 45분. 오른쪽으로 불탄 숲이 펼쳐졌다. 밑동은 탔지만 높은 꼭대기엔 초록잎이 살아있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계곡이 있었으니 불이 그 물을 건너진 못했을 터. 숲의 상흔을 보자 눈물이 났다.


11시. 거림에서부터 2.4km 올라왔다. 산에서 오르막길 2.4km에 45분이면 속도가 양호했다.

21분에 800m 올라, 11시 33분에 북해도교상단 안전쉼터에 다다랐다.

산악회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앉는 내게 청일점이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네,라고 대답하자. 같이 가자고 한다. 크게 손사래를 쳤다. 좀 양순하게 반응할 걸, 놀라서였다.

씻어서 잘라 가지고 간 오이와 수미차가 지난 탄핵 정국 때 광화문에서 준 벚꽃 양갱을 먹었다.

사람들이 올라갔다. 어제 전주역 앞에서 '가지'가 사준 쁘띠첼 워터젤리를 먹었다.

충분히 쉰 후 51분에 다시 출발했다.


12시 3분. 거림에서부터 3.9km, 세석대피소까지 2.1km 남았다.


12시 23분. 거림 1400 고지. 제주도에는 1100 고지가 있다. 그곳은 한참 높은데 지리산에서 1400 고지는 꽉 막힌 숲이라 높게 느껴지지 않는다. 발 밑의 바위와 돌과 흙만 보고 묵묵히 오른다.


혼자 하는 산행은 묵언할 수 있어서 좋다.

문득 2018년 4월, 막 별자리 공부에 심취하신 시인이 ‘해자네 점집’처럼 작가들 회식자리에서 봐주신 내 별점이 떠올랐다.


'깊은 밤 높은 산 절벽을 한 줄기 올라가는 산양'


12시 44분. 세석대피소가 0.5km 남았다.

세석평전이라 그런지 거기서부터는 평평한 오르막이었다. 연분홍 철쭉이 아직 만개한 채 남아있었다. 오른쪽으론 물이 흐르고 있었다. 숲이 우거진 고산지대에 완만한 평지와 물. 과연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빨치산이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다.



12시 54분. 드디어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보였다.

임시급수대를 지나 세석대피소가 있었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 라면 등을 끓이고 있었다. 산에서 제일 귀한 음식이 라면이라지만 고산의 맑은 공기와 라면 스프의 인공적이고 자극적인 냄새는 어울리지 않는다.


세석평전


12시 58분, 2년여 전 단풍이 아닌 연초록에 분홍 철쭉이 울긋불긋한 세석평전을 잠시 눈에 담자마자 다시 장터목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864m 위 촛대봉으로 향했다.


13시 19분. 촛대봉 아래 도착했다. 촛대봉 위로 올라가 그 뒤에 있는 봉우리까지 가보았다. 앵앵 위험하다는 안내 소리가 계속 나왔다. 일행이 있었다면 꼭대기까지 가보았겠지만 무서워서 바위에 기어오르진 못하고 전에 올랐던 바위로 돌아갔다.




13시 30분.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이 춥다고 아우성치며 내려갔다. 거센 산바람이 몰아쳤다. 나는 바위 사이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준비해 간 캔커피와 초코파이를 먹었다. 그리고는 시집을 꺼내 낭송했다.



지리산의 봄 4

-세석고원을 넘으며


고정희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경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듯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젖은 바위

바위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1703.1m 바위에서 어떻게 물이 흐를까.

바람은 바위 사이 뚫린 구멍으로 휘몰아쳤다. 십 분도 버티기 어려운 강풍이었다.

1년 8개월 전 그 바위에 앉아 까마귀 두 마리를 보았었다. 까마귀처럼 멀찍이 떨어져 앉는 거부를 느꼈었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오늘 산을 오른 이유가 아니었다.


세석평전


산양은 제가 희생제물인 줄 모른 채 산에 올랐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가진 부자가 빼앗은 한 마리 양


되돌아간 세석대피소에서 14시 25분부터 왔던 길을 다시 내려왔다.

16시, 불탄 숲을 지날 때였다.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것이 오후 햇살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탄내 나는 나무 사이 시커먼 흙에서 초록빛이 나고 있었다. 시누대였다.




숲은 살아나고 있었다.

나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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