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미사용 시
작년 봄 한순간 어리숙한 조작으로 만년필 수선을 받았다.
서울 을지로 롯데백화점 본점까지 가서 생돈 12만 원이나 주고.
잉크도 5년 지나면 만년필에 좋지 않다고 해서 그간 카트리지 잉크를 쓰느라 십 년 지난 잉크가 병에 절반 이상 남았는데 새 잉크를 사야했다.
고친 만년필과 함께 만년필 사용법 설명서를 받았다.
수십 년 만년필을 갖고 있었으면서 여태 사용법을 잘 몰랐다.
만년필 세척법
1. 분리시켜 준다.
2. 차가운 물에 완전히 잠길 정도로 반나절 동안 담근다.
혹은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깨끗한 물을 주입했다가 빼는 과정을 2-3회 반복한다.
3. 그늘에 건조시킨 후 사용한다.
새해가 밝자마자 십수 년 아껴 쓰던 고가의 빨간 체크 귀마개 모자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장소에서 곧바로 분실물 신고를 했지만 이미 누군가가 가져간 후였다.
(대체 남의 머리에 쓰던 모자를 왜 가져가는 것일까?)
물건이 많지 않고 선별한 것에 애착이 많은 편이라 정초 분실은 가뜩이나 스산한 마음에 다소 치명적이었다.
첫 주일에 뵌 동네 성당 신부님은 오랜만이라고 웃으시며 이제 그만 다니라고 하셨다.
"00에 머물러요."
지명을 곁으로 들은 것처럼, 그 말씀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머물러요. 그 말씀을 올해 말씀으로 삼아야겠다 싶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보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그러지 못하게 했다.
20km나 걸어 발목과 골반 통증으로 절뚝이며 알게 된 사실은 극히 치명적이었다.
사랑도
우정도
* 장기 미사용 시 세척 후 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