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
망각은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출산의 고통을 겪은 엄마가 그 아픔을 잠시 잊었기에 다시 아이를 임신하는 것과 같다. 그냥 힘들었다, 엄청 아팠다 정도로 뭉뚱그려 기억할 뿐, 그 구체적인 통증은 잊기에 우리는 또 한 번 삶이라는 출산에 도전하며 살아간다.
지금 아들과 2박 3일 여행 중이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다 모래를 밟고 걷는데 열두살 아들이 불쑥 물었다.
“엄마, 엄마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야?”
순간, 쓰나미 같았던 지난 2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상치 못한 회사의 자금난, 팀의 해체 등... 2년 새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덕분에 마음은 단단해졌고 웬만한 일에도 덤덤해졌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수업료라면 나는 '선택적 수업료'만 지불하고 싶다.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나를 단단하게 해 준 건 사실이다.
그런데 아들의 질문에 답하려니, 그 쓰나미 같던 2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사람은 늘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힘들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가장 뜨겁기에 과거의 더 큰 아픔은 망각의 축복 아래 희미해진다.
그래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을 받으면 한참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 최근 5년 이내의 사건?아니면 가장 최근의 시간들을 이야기 하게 되는것같다.
나도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언제가 가장 힘들었어?”
“응, 나는 지난주에 학원에서 문제가 안 풀려서 집에 안 보내줄 때! 그때가 진짜 제일 힘들었어!”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내 마음을 할퀴고 간 사업적 풍랑과 아이의 학원 수업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는 같은 무게로 놓이는 순간이었다.
아들에게 이야기해 줬다.
“그래, 사람마다 힘든 순간은 다 있는데 순위를 매기기는 어렵겠지. 너에게는 지난주 학원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던 것처럼, 엄마도 매 순간 힘들 때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거든.”
다시 한번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온 기억들을 생각해 본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 다 이야기할수 없어서 그냥 간단히 이야기하고 바다만 바라봤다. 그 아찔했던 순간들을 이제 와서 씩 웃어 보일 수는 없지만, 피식 웃음이 난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축복 덕분에 매일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다.
파도가 잔잔하다.
벌써 봄이 왔나..
강릉은 날씨도 포근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