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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AI보다 나은 인간일까?

by 시 선


오늘은 왠지 글이 잘 안 써질 것 같다. 어떤 글감도 내 안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만족할 만한 글을 쓸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글이 안 써진다는 핑계를 대는 건 어떨까, 그게 좀 더 있어 보이지 않을까, 누군가 내게 소곤대는 것 같기도 하다.


“AI가 섬뜩한 진짜 이유,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기저에는, 법칙에 속박된 기계가 우리를 대체하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가 아니다. 어쩌면 기계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한 인간 존재를 AI가 넌지시 보여준다는 게 섬뜩한 것이다.”


도서관에 오자마자 <뉴필라소퍼(New Philosopher)>라는 잡지를 펼쳐 AI 미래 시대에 관한 글들을 몇 편 읽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 바로 위의 발췌문이다.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충분히 공감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자신의 취약함을 타인에게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다. 우리 집 고양이만 봐도 그렇다. 어디 다치거나 아픈 곳이 있어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가 드러날까 봐 숨기거나 자리를 피하기까지 한다. 이런 행동은 아마 모든 동물에게 내재되어 있는 생물학적 본능이 아닐까. 약점이 드러나면 그로 인해 공격받을 거라는 경계심이 깊이 뿌리 박혀 있고, 이는 곧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과 직결된다. 바로 생존 본능인 셈이다.


여기서 인간은 한 차원 더 나아가 생존을 넘어서 영적 성장의 부족함마저 드러내기를 꺼린다. 예를 들어, 부모는 자신을 꼭 닮은 자녀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면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고치려 든다. 심지어 그런 자녀를 탓하고 혼내기도 한다. 그 원인이 자신이 평생 감추고 싶어 했던 자신의 약점 때문이라는 것을 부모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영혼은 이미 알고 있기에 불안함과 괴로움을 느낀다. 자녀의 약점을 개선하는 일이 마치 자녀를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업이자 소명인 양 착각에 빠진다. 부모는 사실 자녀가 자신을 대신해 모든 것을 극복하여 인간 승리 같은 것을 안겨 주기를 바라며 대리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을 기만하면서까지 자신의 취약점을 감추려 한다.




다가오는 AI 미래 시대가 어떠할지 아무도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아무리 감정을 갖추고 지능이 뛰어난 생성형 인공지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하고 나아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AI는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지능 즉, 자연 지능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다른 점에 대해 AI 기반의 ChatGPT에게 자문을 구해 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진정한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AI는 감정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실제로 느끼거나 진심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둘째, 인간은 상황에 따라 복잡한 윤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반면, AI는 설정된 기준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올바른 윤리적 선택은 아니다.


셋째, 인간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거나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 AI도 창의적인 결과를 낼 수는 있지만, 인간의 직관적인 영감이나 통찰력은 따라가기 어렵다.


넷째,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으나, AI에게는 그런 자기 성찰이나 의미에 대한 갈망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을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AI는 학습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판단할 뿐, 인간처럼 삶의 무게 속에서 우러나오는 판단은 어렵다.


이처럼 AI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기와 인간을 비교 분석해 판단하였다. 그것이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타인인 나에게 기꺼이 공유해 주었다. AI는 인간과 달리 자기의 취약점마저 그대로 모두 밝힌다. AI의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에 인간은 두려움을 갖는다. 동시에 AI가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AI와 인간의 확연한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그건 바로 뇌,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영혼에 달려 있지 않을까. 인간은 영혼이 있고, AI는 영혼이 없다. 한 인간의 뇌는 그의 영혼이 차지하는 소우주와도 같다. 그 우주는 그의 고유한 영역으로 유일하며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그곳을 넘나드는 영혼으로 인해 인간은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실을 넘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생각을, 상상을, 미래를 현실로 구체화하며 지금까지 진화해 이 지구상에서 더없는 일인자로서 삶을 누리며 살고 있다. AI는 기껏해야 인간이 입력해 준 데이터의 총량 정도가 뇌의 역할을 할 텐데,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다만 AI보다 못한 인성과 지능을 갖춘 인간이라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AI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니, 확답이 서지 않는다. 나는 그저 저 들판에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신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왼쪽 눈 말고 멀쩡한 게 두 가지 있잖아,

내 상상력과 내 기억들

그게 내가 잠수종에서 벗어날 유일한 수단이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잠수종과 나비>가 생각난다. 주인공 보비는 유명한 패션 매거진 '엘르'의 편집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니 온몸이 마비되고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 의식은 있으나 말을 할 수 없고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한쪽 눈꺼풀뿐이었다.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고 그는 크게 절망하지만, 주위에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한쪽 눈 깜빡임으로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을 배우게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 책을 출판하기에 이른다. 그의 몸은 비록 잠수종에 갇혀 한없이 가라앉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상상력과 기억에 날개를 달아 나비가 되어 힘차게 자유를 향해 날아올랐다. 나는 이 감동적인 실화를 통해 인간이 인간이어서, 인간이기에 가능한, 인간에게 존재하는 그 무한한 영혼의 깊이에 경이로움과 경외심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과거나 현재, AI 미래 시대에도 인간이 기댈 것은 단 한 가지. 가장 인간다운 것,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인간 영혼의 실존 아닐까? 그건 어떤 AI도 대체할 수 없다.




AI 미래 시대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자리가 AI로 대체되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보다 뛰어난 정보 처리 능력을 가진 AI에 많은 것을 의존하며 살고 있다. 스마트폰에 기대 더 이상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게 된 것처럼, 앞으로 우리는 AI의 도움 없이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시대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AI와 인간의 역할이 뒤바뀌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제 와 이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AI를 피할 수도 없다. 피해서도 안 된다.


AI와 공존으로 더욱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누리되, 매 순간 우리가 가장 인간다운 영역—바로 영혼 실체의 현존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주만큼 깊고 넓은 인간의 영혼이 품을 수 있는 생각과 상상력을 발휘하고, 인간이기에 가능한 적응력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늘 존재해 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AI 미래 시대에 닥쳐올 문제 또한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을 찾아 행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오늘도 나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과 상상력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이 글 한 편을 완성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만족할만한 완벽한 글은 아니지만, 서투르고 미흡하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글'임을 자부하며 스스로 위안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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