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불편한 편의점』을 읽고
이 문장에 호기심이 간다. 자타공인 베스트셀러에다가 현재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공식적으로 추천하는 책, 김호연의 장편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고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바로 이 소설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이 문장이 있는 단락이었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 왔다면, 그것에 대해 톡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 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봉인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하늘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글도 밀도를 더해갔다."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163쪽)
'언젠간 나도 이런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그에 앞서, 지난 1년 넘게 글쓰기를 하면서 이런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 글쓰기'를 한 적이 있었나? 스스로 자문하였다. 단번에 대답할 수 없었다. 불행히도 난 그런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은 항상 하고 있지만, 나름 톡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도 키워본 적 있지만, 내가 타자수가 되어 자판을 누른 적은 결코 없었던 거다. 내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대신 늘 생각의 속도가 느려 내 손가락은 하릴없이 쉬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왼손과 오른손이 대화를 나누 듯 타이핑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소설 속 인경을 상상해 본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인가를 묻는 질문이 쉴 새 없어 들어섰다. 뻔한 스토리와 인물 설정 특히, 이해가 잘 안 되는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이 되게 미약하게 다가왔다. 완전히 공감이 되어 소설이 그려내는 장면에 폭 빠지지 못하고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그럴 수도 있나?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며 억지스럽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면서 책의 장면들을 따라 읽어 내려가야 했다. 한 마디로 전혀 몰입이 되질 않았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몰입을 하고 재미를 느꼈기에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일까. 주인공인 의사가 노숙자가 된 사연이 궁금해서일까. 그 사연도 개연성이 많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고 소설 후반부에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코로나19에 의한 대구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는 설정도 조금은 어색했다. 이건 그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소감인 거다. 어떤 사람은 또 이런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고 공감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분명히 좋은 메시지는 있었다. 사람은 사람에 의해 치유된다는 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베스트셀러가 괜히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전에 내가 알던 친구도 이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고 넌지시 비친 적이 있지 않았나. 그래. 그저 나와 좀 결이 다른 것뿐이야.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내가 결이 다르다는 것일까? 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고 내 글이 나를 떠나 그들의 글이 되기를 바란다는 나의 야심 찬 야망은 가능하기나 한 걸까? 나는 어쩌면 대중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일까. 이제껏 sns나 여기 브런치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보지 못한 나였다.
갑자기 그건 대중이 판단할 일이니 '너는 어서 글이나 쓰라'는 경고가 훅 들어온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쓰는 글이 대중적이든 대중적이지 않든, 그건 대중이 판단할 몫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대중을 위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나. 결국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글만 쓸 텐데 그 글이 대중적이든 대중적이지 않든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허황된 걱정은 그만 접어두고 '우선 글부터 쓰자'는 것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메시지가 되겠다. 그래 쓰기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