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박완서『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도서관 다녀오는 길에 아는 사람을 더러 마주칠 때가 있다. 평소와는 좀 다르게 차린 나를 보며 상대는 인사치레 묻곤 한다. “이렇게 예쁘게 입고 어디 다녀오세요?” 전업주부인 내게 뭔가 특별한 약속이나 일정이 있었을 것을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보통 난 어물어물 대답한다. “그냥 볼 일이 있어서요.” 거기까지만 말하면 딱 좋겠다 싶어 황급히 상대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사연을 구구절절 말하느라 내가 어디에서 무슨 볼일이 있었는지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간혹 나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좀 친한 지인이라면 “무슨 일인데?, 누구 만났어?” 하며 한 번 더 물어온다. 그제야 난 나지막이 입을 뗀다. “도서관 다녀오는 길이에요. 반납할 책이 있어서요” 대개 그것도 사실은 사실이나 내가 도서관에 다녀오는 연유가 따로 더 있다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는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터놓고 말하기가 조금 꺼려진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도 쓴다. 작년 인천 교육 시청에서 주관했던 <내 인생 첫 책 쓰기>라는 홍승완 작가님의 강의를 듣고, 뜻밖에도 난 글쓰기에 매료됐다. 아무도 시키지 않고, 누구에게 의뢰받지도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내가 마치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것처럼 도서관에 다닌다. 아침부터 나를 단정하게 차리고 카페에 들러 커피까지 사 들고 간다. 어찌 보면 이건 하나의 리츄얼(ritual)이다. 최소 2시간, 안 되면 1시간이라도 어떻게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겠다는 나의 의지다. 남편은 집에서 하면 되지 번거롭게 도서관까지 가냐고 뭐라 하지만, 내게 글쓰기란 굳이 시간을 들여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의식을 심어주고 의지를 다져줘야 비로소 용기를 내어 할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지켜가고 싶은 꿈이다.
솔직히 이제 난 꿈이라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꿈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너무 거창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뤄질 수 없다고 해도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어떤 추상적인 이미지 같아서다. 내게 20대 때의 꿈이 그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평범한 주부가 되고 나서 그 꿈이 얼마나 허망스러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한동안 그 꿈과 최대한 멀어지려고 애를 쓴 적도 있다. 난 살고자 일부러 꿈과 멀리 있는 곳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나를 이끌어 주던 꿈과 멀어지니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고 꿈의 허상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면서, 그것이 곧 집착이었다는 것을 직시하고 나서야, 마침내 꿈이라는 걸 내게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둘 수가 있었다. 모두가 열정의 꿈을 꾸라고 말하지만, 집착처럼 꿈을 바랐던 난 여전히 꿈이 미덥지 않고 조심스럽다. 게다가 내가 이제 와서 다시 꿈을 꾼다는 것이 막연히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내가 지켜가고 싶다는 꿈을 말하다니! 이건 나로선 대단한 포부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내가 글을 쓰는 것이, 더 나아가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난 왜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까. 20대처럼 꿈만 꾸다 말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아예 꿈도 꾸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일까. 혹여 꿈이 아니라도 단순한 취미로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나 운동을 하나 산책하러 나가는 것과 뭐가 그리 다르다고 난 왜 이리 부끄러울까. 그러다 박완서 님의 글을 읽으며 이런 나의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의 정체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아직 내 소설 쓰기에 썩 자신이 없고 또 소설 쓰는 일이란 뜨개질이나 양말 깁기보다도 실용성이 없는 일이고 보니 그 일을 드러내 놓고 하기가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382쪽-
이것이구나! 내가 왜 말을 못 하는지, 내가 왜 부끄러운지.
나 역시 내 글쓰기에 아직 자신이 없다. 글을 꾸준히 읽어 오긴 했어도 글을 쓴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완성을 향한 목적으로 글을 써본 건 작년 강의를 들으면서 과제로 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전에는 기껏해야 일기나 블로그에 몇 자 끼적였던 게 다였다. 그것도 어쩌다 한번 드문드문 있는 일이었다. 하나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이 아니 하나의 문장을 쓰더라도, 독자를 의식하여 읽기 좋게 쓴다는 것이 이렇게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난생처음 알았다. 글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이나 보람과 같은 기쁨이 내겐 몹시도 크게 느껴졌다. 나처럼 느리고 서툰 내 글을 하나하나 조금씩 수정하고 다듬어 가는 것이 꼭 그런 나를 가꾸는 일 같아 뿌듯했다. 정확히 거기에 매료되었다. 글을 쓰고 다듬어 간다는 건 곧 내 삶을 다듬어 완성해 간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어 영 자신이 없는 것이어서 그 누구 앞에서 '내 글'을,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당당히 드러낼 수 없던 것이다.
내 글쓰기 또한 실용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집에서 식물을 키우거나 소잉 소품을 하나 만드는 것이 훨씬 유용한 일일 테다.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글쓰기는 철저히 나를 위한 일이므로, 그저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이므로, 현재 아무 효용이 없는 이 일을 누구 앞에서 자신 있게 밝히는 것이 꺼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영 꺼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언젠가는 내 글이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나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고 공감받고 삶의 감동과 위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내 글에 실용성 그 이상의 가치가 생기기를 희망한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글쓰기는 꽤 쓸만한 일이 되지 않을까.
“나는 내 소설을 읽었다는 분을 혹 만나면 부끄럽다 못해 그 사람이 싫어지기까지 한다. 만일 내가 인기 작가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온 세상이 부끄러워 밖에도 못 나갈 테니 딱한 일이지만, 그렇게 될 리도 만무하니 또한 딱하다. 내 소설이 당선되자 남편의 태도가 좀 달라졌다. 여전히 밤중에 뭔가 쓰는 나를 보고 혀를 차는 대신 서재를 하나 마련해 줘야겠다지 않는가.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서재에서 당당히 글을 쓰는 나는 정말 꼴불견일 것 같다.”
-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382쪽-
나도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서재에서 당당히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나는 내가 꼴불견 같아서가 아니라, 그러고 있을 내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기뻐서, 행복에 겨워 통쾌한 웃음이 날 것 같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리 만무하니 그것 또한 딱하다고 했던 박완서 님은 그분의 이런 미래를 상상이나 하셨을까. 한국 문학의 거목이 되는 미래, 고인이 되어도 그분이 남긴 글자들은 활활 발발 살아남아 여기 지금 나에게까지 읽히고 생생한 감동을 주는 미래를 말이다.
만약 미래인 것이 현재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날이 온다는 것을 예정한다면,
꿈이라는 말에 기대지 않고 담담히 먼 미래의 나를 그려 본다. 서재에서든, 도서관에서든, 글을 쓰며 살아가는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내가 글을 쓴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그 언젠가 다가올 먼 미래를 상상하며, 현재는 아무 효용 없는 이 글쓰기를 위해 오늘도 나는 집을 나선다. 도서관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