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타자가 힘없이 배트를 돌렸고 배트에 맞은 공은 얼마 못 굴러가 투수 글러브 속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공을 잡은 투수가 1루수에게 공을 던져 투수 땅볼 아웃!
마운드 위의 등번호 41번 투수는 두 팔을 힘껏 들어 올리며 포효하였고 역시나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달려오는 포수에게 안겨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뒤따라 모여든 모든 선수들이 희열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얼싸안고 온몸으로 기쁨을 느끼고 있었고, 관중들 역시 기쁨과 자부심에서 나오는 뜨거운 함성과 환호로 선수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그 장면을 TV로 보고 있던 한 고딩은 역시 우리 팀이 최고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언제까지나 우리는 강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쁨은 언제라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1994년의 그 찬란하고 아름답던 가을은 매년 돌아올 것이라고...;;;
그런데 아... 그런데... 그 고딩이 이제는 고딩 학부모가 됐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는 동안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1994년부터 2021년까지 자그마치 27년 동안 나는 고통을 감내해 왔다. 때로는 바닥을 치는 성적으로 다른 팀 팬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때로는 잘 달리다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해서 아쉬움을 곱씹어야 했다.
그 망할 놈의 DTD와 꼴쥐, 칠쥐 등등의 굴욕적인 말들과 LG 기사마다 달리던 타 팀 팬들의 조소 섞인 댓글들을 보면서 부들부들했던 기억들...
영욕의 세월을 헤치고 오면서 나는 두산 팬인 절친이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보내는 비웃음과 가당치 않은 동정을 오롯이 받아내야 했고, 갈아타라, LG가 너한테 해준 게 뭐 있냐, 이제 따뜻한 두산 품으로 와.. 등등 온갖 유혹과 회유를 이겨내 가며 여전히 고통스러운 사랑에 빠져 있다.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 그 옛날에 왜 그렇게 잘 나가서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인가. 전신인 MBC 청룡은 성적 면에선 별 볼일 없었지만 LG 트윈스로 재창단한 원년인 199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는 줄곧 강팀으로 군림했었다. 아, 줄곧은 아니다...;;;
팀 역사상 유이한 1990년과 1994년의 우승도 정규 시즌 1위에 한국시리즈 상대팀인 삼성과 태평양을 각각 4대 0으로 철저하게 발라줬던 압도적인 우승이었다. 그러던 팀이 2000년대 들어서 길고 긴 암흑기를 거치게 되었고 그 팀의 찐 팬인 나는 야구에 관한 한, 한창 혈기왕성할 2~30대 시절을 뭔가 위축된 채로 보내야만 했다.
찬란했던 옛 영화는 4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물가물해져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삼을 수도 없게 됐고, LG를 떠올리면 통쾌하고 신나는 기억보다는 뭔가 안타깝고 답답한 기억이 훨씬 많아졌다.
긴긴 암흑기에 비해서는 확실히 형편이 좋아진 요즘이라 예전에 비해 LG 팬임이 떳떳하고 응원할 맛도 나지만 그래도 우리 팀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져 오는 건 왜일까?
어제 롯데에게 10년 만에 스윕을 당했다는 것, 벌써 올해만 홈에서 두 번째 스윕이라는 것, 그 두 번의 스윕이 겨우 열두 번의 홈경기를 치르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이게 다 우리 팀이어서 남들 보기 민망하고 어디 가서 말하기 좀 그런 걸까? 다른 팀 팬들도 이런 경우에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까?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리 팀이지만 어딘가 미심쩍고 불안 불안하다. 창단한 지 30년 넘게 지났는데도 지난달에 입사한 인턴사원의 풋풋함을 지닌 마성의 팀 같으니라고...
예전의 나는 오직 포털에서 스포츠 기사만 특히 야구, 그중에서도 특히 LG에 대한 기사는 빼놓지 않고 찾아보는 사람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문맹임을 알아차린 후부터는 아침마다 경제신문을 정독하고 투자와 경제 관련 책들을 한 달에도 몇 권씩 읽는 사람으로 변한 관계로 스포츠에 관한 관심은 90% 이상 끊었다.
하지만 아직도 LG 경기는 중계를 모두 보지는 못하더라도 설거지를 하면서, 러닝머신을 뛰면서, 샤워를 하는 동안 잠깐씩이라도 챙겨보고 경기 결과를 확인하고 다음날 관련기사를 찾아본다.
아마도 불치병에 걸렸는데 완치되려면 두산을 응원해야 한다거나 아들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났는데 그 아버지가 LG팬 아버지를 둔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두산 팬인 경우가 아니라면 LG를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평생 갈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무슨 독립투사라고 한번 정한 우리 팀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바꾼다고 하는가.
무슨 마더 테레사라고 나를 위해 그깟 우승 한번 해주지 않는 너를 무조건 사랑하는 건가.
대답 좀 해봐라, LG야.
아니다. 넌 지금까지 시원하게 답을 준 적이 별로 없었지.
그러니까 그냥 내가 생각해 보는 게 낫겠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도 한번 돌아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