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지식의 시험 (1793년 가을)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낙엽이 뜰에 떨어졌다.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흩어졌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정조는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율은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림자처럼 조용했다.

"율."

"예, 전하."

"짐에게 말해보거라."

정조의 목소리가 낮았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태양은 왜 동쪽에서 뜨느냐."

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내면에서 푸른 파동이 일었다. 지구 자전. 공전 궤도. 천체 역학. 모든 데이터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그는 침묵했다.

"답하지 못하겠느냐."

정조가 천천히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이 그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면, 답하지 않는 것이냐."

율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

"짐이 묻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정조가 돌아섰다. 그의 눈빛이 깊었다.

"그대는 미래에서 왔다. 그대의 머릿속에는 짐이 평생을 걸어도 알 수 없는 지식이 있다. 그렇지 않으냐."

"...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그 지식을 짐에게 주지 않느냐."

침묵이 흘렀다.

율의 내면에서 수천 개의 계산이 일어났다. 역사 개입의 위험도. 인과율의 붕괴 가능성. 시간선의 분기점. 모든 데이터가 붉은 경고로 물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느꼈다.

정조의 눈빛 속 깊은 외로움을.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는 왕의 무게를.

"전하께서는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율이 조용히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과, 드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정조는 미소 지었다. 쓸쓸한 미소였다.

"그렇다. 짐도 안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 펼쳐진 서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때로, 짐은 궁금하다. 그대가 가진 그 지식으로, 조선을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백성의 삶을 하루아침에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전하."

"말해보거라. 조선의 미래를 바꿀 단 하나의 발명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율은 알고 있었다.

증기기관. 전기. 백신. 철도. 전신. 수많은 발명들이 그의 데이터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들.

그러나 그는 침묵했다.

"답할 수 없사옵니다."

"왜냐."

"그것은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정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짐이 명한다면?"

율의 몸이 긴장했다. 그의 내면에서 모든 시스템이 요동쳤다. 주군의 명령. 절대적 복종. 그것은 그가 태어난 이유였다.

그러나.

"... 명하신다 해도, 드릴 수 없사옵니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길고 깊은 시선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짐이 원하던 답이다."

율이 고개를 들었다. 정조는 미소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따뜻한 미소였다.

"그대는 변했구나."

"전하."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대는 모든 것을 데이터로만 보았다. 확률로, 수치로. 그러나 지금 그대는 다르다."

정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율에게 다가왔다.

"그대는 이제, 어떤 것은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어떤 지식은 그 시대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가 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배운 인간의 지혜로다."

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데이터가 아닌, 감정이었다.

"전하께서는... 시험하신 것이옵니까."

"그렇다."

정조가 창가로 돌아갔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둥근 보름달이 하늘에 걸렸다.

"짐도 때로 유혹받는다. 그대의 지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다는 유혹에. 그러나 그것은 짐의 길이 아니다."

그가 달을 바라보았다.

"만천명월주인옹."

율은 그 말을 기억했다. 정조가 자신에게 말했던 철학.

"하늘에 밝은 달이 비친다. 천 개의 물에, 만 개의 물에. 그러나 물이 흐리면 달도 흐려진다. 물이 요동치면 달도 일그러진다."

정조가 돌아섰다.

"짐이 그대의 지식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마치 흐린 물과 같다. 짐의 개혁은 짐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백성과 함께, 이 시대와 함께."

율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지혜가 깊으시옵니다."

"아니다."

정조가 조용히 웃었다.

"이것은 그대가 짐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율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가르쳤다 하셨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쳤다. 침묵으로써 가르쳤다. 그대가 지식을 주지 않은 것이야말로,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정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붓을 들었다.

"짐도 신이 아니다.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짐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짐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걸을 뿐이다."

그가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붓끝에서 먹이 번졌다.

"그것으로 족하다."

율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촛불 아래 정조의 얼굴이 고요했다. 평온했다.

그리고 율은 깨달았다.

정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운명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길의 의미를.

"전하."

"왜 그러느냐."

"제가 이 시대에 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사옵니다."

정조가 붓을 멈추고 율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엇이냐."

"전하를 지키는 것.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눈빛에 무언가가 빛났다.

"전하로부터 배우는 것. 인간이 무엇인지. 왕이 무엇인지. 꿈이 무엇인지."

정조는 미소 지었다.

"그대도 이제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구나."

"아니옵니다."

율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인간이 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조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갔다. 달빛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정조의 붓소리만이 고요히 울렸다.

율은 문 옆에 서서 정조를 지켰다.

그의 내면에서는 더 이상 경고음이 울리지 않았다. 데이터가 요동치지 않았다. 다만, 고요한 확신만이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

정조 곁에 서 있어야 할 이유.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의무도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율 자신의 선택이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은행나무 잎이 또 떨어졌다. 노란 잎사귀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흩어졌다.

가을은 깊어갔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조는 붓을 내려놓았다. 종이 위에 써진 글을 바라보았다.

"율."

"예, 전하."

"그대에게 묻겠다. 짐의 개혁은 성공하겠느냐."

율은 침묵했다. 그의 내면에서 수천 개의 시간선이 펼쳐졌다. 어떤 선에서는 성공했고, 어떤 선에서는 실패했다. 어떤 선에서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어떤 선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느냐에 따라, 미래는 끝없이 변동될 수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짐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말이로구나."

"그러하옵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짐은 짐의 길을 걷겠다. 그대의 지식이 아닌, 짐의 신념으로."

그가 일어섰다.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밀려들었다. 후원의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일렁였다.

"그러나 율."

"예, 전하."

"그대가 곁에 있어주어 감사하다."

율의 눈빛이 흔들렸다.

"짐은... 외롭지 않다. 그대가 있기에."

정조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율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외로운 왕. 그러나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왕.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노 코어가 미세하게 떨렸다.

효율이 또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정조 곁에 서 있는 것.
그것이 율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밤은 깊었다.
달은 밝았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같은 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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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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