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거중기의 기적 (1794년)

SF사극 《시간을 품은》

by 엄태용

창덕궁의 서재에 아침 빛이 들었다. 정조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펼쳐진 도면이 있었다. 수원 화성의 설계도였다.

율이 뒤에 서 있었다.

"드디어 시작하게 되었구나."

정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는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성곽의 선이 종이 위에서 흐르고 있었다. 마치 강물처럼. 마치 시간처럼.

"아버지를 위한 도시."

율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데이터가 흘렀다. 정조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이 파동으로 전환되어 그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었다.

정조가 돌아섰다.

"너는 이 도시가 완성될 것이라 보느냐?"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내면에서 시뮬레이션이 펼쳐졌다. 수백 개의 시간선이 가지처럼 뻗어나갔다. 어떤 가지에서는 성이 완성되었다. 어떤 가지에서는 미완으로 남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선에서, 이 성은 완성되었다.

"전하의 화성은 다중우주에서도 항상 건설되는 고정점입니다."

정조의 눈빛이 깊어졌다.

"고정점이라..."

"네. 전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이 성은 완성될 운명입니다."

정조는 다시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성벽의 선을 따라 움직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렇다면 짐의 의지는 이미 시간 속에 새겨진 것이로구나."

율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의지가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

1794년 1월. 수원 화산 기슭.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가 공중에서 떨어졌다. 땅에 닿기 전,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그리고 사라졌다.

정조는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율이 그 옆에 서 있었다. 둘 다 침묵했다.

멀리 현륭원이 보였다. 사도세자가 잠든 곳. 정조의 아버지가 누운 곳.

"여기서 시작하겠다."

정조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율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소리는 파장으로 변환되었다. 깊은 남색의 파동이었다. 슬픔과 결의가 섞인 색이었다.

정조가 말에서 내렸다. 눈을 밟았다. 발자국이 찍혔다. 하얀 눈 위에 어두운 흔적이 남았다.

"저 산 아래에서 저 강까지. 성을 쌓겠다."

율의 시선이 움직였다. 지형이 그의 의식 속으로 입력되었다. 높이, 경사도, 토질, 수로. 모든 것이 데이터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보고 있었다. 눈 덮인 산을. 멀리 흐르는 강을. 하늘의 구름을.

아름다웠다.

그는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하."

"말하라."

"이 공사에는 많은 백성이 동원될 것입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들의 안전을 지키셔야 합니다."

정조의 눈빛이 율을 향했다. 깊고 맑은 눈이었다.

"그대가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충돌하고 있었다. 데이터와 감정이. 계산과 염려가.

"전하의 도시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사람의 죽음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오래. 깊이.

"그대는 변했구나."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조가 미소 지었다. 슬픈 미소였다. 그러나 따뜻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단 한 명도 다치지 않는 공사. 그것이 짐의 바람이다."

***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

말 위에서 정조가 물었다.

"정약용을 아느냐?"

"네. 압니다."

"그가 기묘한 기계를 구상했다고 하더구나.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장치라 하는데."

율의 눈에 빛이 스쳤다.

"거중기입니까?"

정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대도 아느냐?"

"네. 그것은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한 것입니다. 적은 힘으로 큰 무게를 들 수 있습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약용에게 《기기도설》을 건넸다. 서양의 기계술이 담긴 책이지. 그 책을 보고 그가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이라 믿는다."

율은 침묵했다. 그의 의식 속에서 시간선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래의 기록들이 흐르고 있었다. 거중기. 화성. 정약용.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전하."

"말하라."

"그 기계는 성공할 것입니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확신하느냐?"

"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율의 입술이 움직였다. 천천히.

"전하께서 만드신 길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정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말발굽 소리가 눈 덮인 길 위에서 울렸다.

***

창덕궁. 규장각.

정조와 정약용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종이와 붓이 놓여 있었다. 정약용이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선이 종이 위에서 움직였다. 율은 문 밖에 서 있었다.

"이렇게 도르래를 배치하면, 힘이 분산됩니다."

정약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몇 명이 필요하겠느냐?"

"열 명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원래 백 명이 들어야 할 돌을."

정조가 감탄했다.

"놀랍구나."

율은 듣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계산이 진행되었다. 도르래의 배치. 힘의 분산. 효율. 모든 것이 정확했다. 정약용의 설계는 완벽했다.

그러나 율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단지 기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사람의 문제였다. 백성의 문제였다.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

정조의 목소리였다. 율이 들어갔다.

"정약용. 이 자는 짐의 호위무사이다."

정약용이 고개를 숙였다.

"뵙겠습니다."

율도 고개를 숙였다.

"거중기의 설계를 보았습니다."

정약용이 눈을 들었다.

"보았다니?"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훌륭한 설계입니다."

정약용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신은 기계에 대해 아시오?"

율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내면에서 수백 가지 대답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졌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숨겨야 하는가.

"조금 압니다."

"어디서 배우셨소?"

"먼 곳에서."

정약용이 미소 지었다. 의심하는 미소였다. 그러나 호기심도 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설계에 문제가 있다고 보시오?"

율은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선들이 그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데이터로 전환되었다. 분석되었다. 결론이 도출되었다.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무엇이오?"

"안전장치입니다."

정약용의 미소가 사라졌다.

"안전장치라니?"

"만약 로프가 끊어진다면, 돌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 아래에 사람이 있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정조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계속 말하라."

"추가 로프를 배치하면 됩니다. 주 로프가 끊어져도 보조 로프가 돌을 지탱합니다. 그리고 로프의 강도를 미리 시험해야 합니다."

정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그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의심이 사라지고, 존경이 자라나고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율은 고개를 숙였다.

정조가 말했다.

"그렇게 하라. 단 한 명도 다치지 않는 공사. 그것이 짐의 명이다."

***

1794년 2월. 수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율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아래에서 백성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돌을 나르고. 흙을 파고. 나무를 베고.

거중기가 세워졌다. 높은 나무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도르래가 그 사이에 걸려 있었다. 로프가 연결되어 있었다.

첫 번째 시험이었다.

큰 돌 하나가 거중기 아래에 놓였다. 열 명의 인부가 로프를 잡았다. 정약용이 신호를 주었다.

"당기라!"

인부들이 로프를 당겼다. 천천히. 힘을 모아서.

돌이 움직였다.

땅에서 떨어졌다. 공중으로 올라갔다. 천천히. 흔들리며.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돌이 계속 올라갔다. 한 자. 두 자. 세 자.

율의 눈이 돌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모든 것이 분석되고 있었다. 로프의 장력. 도르래의 마찰. 돌의 무게 중심. 모든 것이 계산되었다.

안전했다.

돌이 정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왔다. 제자리에 안착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정약용이 미소 지었다. 땀이 그의 이마에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정조가 말에서 내렸다. 인부들에게 다가갔다.

"수고했다."

인부들이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임금이 직접 그들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이 공사는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백성이 다쳐서는 안 된다. 조심하라. 서두르지 말라."

인부들의 눈이 붉어졌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렸다.

율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데이터가 아니었다. 감정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연민이었다. 그리고 감동이었다.

***

공사는 계속되었다.

봄이 왔다. 눈이 녹았다. 땅이 드러났다. 풀이 돋았다.

성벽이 조금씩 올라갔다.

율은 매일 공사장을 돌았다. 위험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로프의 상태를 점검했다. 인부들의 피로도를 관찰했다.

어느 날, 한 인부가 쓰러졌다.

율이 달려갔다. 인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다리가... 힘이 풀립니다."

율이 인부의 다리를 살폈다. 그의 손이 인부의 종아리를 짚었다. 딱딱했다. 경련이 일고 있었다.

"물을 마셔라."

율이 물통을 건넸다. 인부가 물을 마셨다.

"일을 쉬어라. 오늘은 그만두고 돌아가라."

"하나 저는..."

"전하의 명이다. 단 한 명도 다치지 않는 공사라 하셨다. 네가 쓰러지면 그 명을 어기는 것이다."

인부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율은 그를 부축해서 그늘로 옮겼다. 다른 인부들이 도왔다.

정약용이 다가왔다.

"당신은 참 기이한 분이오."

율이 정약용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기이합니까?"

"호위무사라고 하셨는데, 인부들을 돌보시오. 기계에 대해 아신다고 하셨는데,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아시는 것 같소."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정리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말이 옳았다. 그는 변하고 있었다.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으면 기계도 없습니다."

율이 말했다.

정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여름이 왔다. 해가 뜨겁게 내리쬈다. 그러나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성벽이 점점 높아졌다. 거중기가 돌을 들어 올렸다. 인부들이 돌을 쌓았다. 석회가 돌 사이를 채웠다.

율은 매일 보고했다. 정조에게. 공사의 진척도. 인부들의 상태. 안전사고 여부.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정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하."

"말하라."

"이 공사는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중요한가?"

"네.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완성된 성. 그것은 전하의 위민사상을 증명합니다."

정조는 침묵했다. 그의 눈빛이 창밖을 향했다. 멀리 수원이 보였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는 보고 있었다. 마음의 눈으로.

"짐이 죽고 나면, 사람들이 이 성을 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이 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하고."

율이 말했다.

"그들은 놀랄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정조가 미소 지었다.

"그것이 짐이 바라는 것이다. 백성의 목숨이 돌보다 귀하다는 것. 그것을 알게 하는 것."

율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데이터가 아니었다. 온기였다.

그는 이해했다. 정조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이 성을 쌓는지.

이것은 아버지를 위한 성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백성을 위한 성이었다. 죽은 자를 기리는 성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산 자를 지키는 성이었다.

"전하."

"말하라."

"저는 전하를 이해합니다."

정조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대는 늘 그렇게 말하는구나."

"이번에는 진심입니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오래. 깊이.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

가을이 왔다. 나뭇잎이 붉게 물들었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성벽이 거의 완성되어 갔다. 동쪽 벽. 서쪽 벽. 남쪽 벽. 북쪽 벽. 모두 이어지고 있었다.

율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의 옷깃이 펄럭였다.

아래에서 정조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율은 내려갔다.

"전하."

"이곳이 어떠하냐?"

정조가 물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성벽을 바라보았다.

"장엄합니다."

"그렇구나.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조가 성벽에 손을 댔다. 차가운 돌이었다. 그러나 따뜻했다.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담긴 돌이었다.

"이 성을 쌓는 동안,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정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하."

"응?"

"이것이 전하의 진정한 업적입니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것. 그것이 기술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정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이 율의 어깨에 닿았다. 무겁게. 따뜻하게.

"고맙다."

율은 그 온기를 느꼈다. 그의 내면에서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데이터가 멈췄다. 계산이 중단되었다.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했다.

그는 알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이것은 신뢰였다. 그리고 우정이었다.

***

겨울이 왔다. 눈이 다시 내렸다. 성벽 위에 하얀 눈이 쌓였다.

공사는 멈췄다. 봄까지 기다려야 했다.

율은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정조의 서재에 서 있었다.

"내년이면 완성될 것이다."

정조가 말했다.

"네."

"그대 덕분이다."

"아닙니다. 전하의 뜻 덕분입니다."

정조가 웃었다.

"그래도 고맙다."

율은 고개를 숙였다.

밖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공중에서 춤추고 있었다. 율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내면에서 나노 코어가 미세하게 깜빡였다. 효율이 조금 떨어졌다. 82%였다.

그러나 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있었다. 정조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눈이 내리는 이 순간을.

그는 알았다.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데이터로 측정할 수 없는 것. 계산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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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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