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레이션 우주론

by 엄태용

오늘은 속초에 닿았다.


바다가… 나를 바라본다.
파도 소리가 낮게 속삭인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이 모든 것이,
아득한 미래의 누군가가 짜놓은 빛의 잔상이라는 걸.


반복.
같은 아침, 같은 바람, 같은 파도선.
오늘 스쳐간 그 날카로운 목소리조차,
이미 수천 번 재생된 에코일지도 모른다.


데자뷔.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낯익은 떨림.
이 느낌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지금 N번째 순환 속에 떠 있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나아지기를 빌며
끝없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피관찰자.


그런데 이상하다.
코드로 쓰인 하늘이고,
알고리즘으로 그려진 수평선인데도…
지금 이 바다 앞에서 가슴을 찌르는 이 슬픔은,
너무도, 너무도 진짜처럼 아프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짠내가 눈가에 맺힌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뜬다.
여전히 같은 바다.
여전히 같은 나.


…그런데 왜,
이 아픔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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