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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Jan 28. 2017

지나고 보면 좋은 게 아니라 할 때가 제일 재밌죠

미디어 아티스트 윤민철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 윤민철 감독의 집이자 작업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음식 하는 냄새가 풍겨왔다.

   대낮부터 수육을 삶고, 요리를 잘 하시나 봐요. (미리 얘기하자면 인터뷰가 끝나고 대접받은 수육은 정말 맛있었다.)


   요리가 취미예요.


   언제부터 요리가 취미였어요?


   이것도 연극인 데이트 질문이에요?


   네.(웃음) 연극 얘기도 좋지만 저는 이런 것도 궁금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랑 둘이 살았어요. 편식이 심해서 먹고 싶은 건 정해져 있고, 청소년기라 먹는 양은 많은데 맨날 사먹을 순 없고. 어머니가 요리를 잘 하셔서 나도 그만큼은 할 수 있나, 그러면서 해봤죠. 군대를 교도소로 갔는데 남들보다 좀 늦게 갔더니 편한 일을 준 거 같아요. 취사반으로. 교도소는 군대랑은 좀 달라서 요리를 가르쳐주고 조리사 자격증을 따게 해줘요. 그러다 보니까 대학 때도 후배들하고 같이 요리해서 먹고, 그랬어요. 요즘 또 살을 빼고 있어서 혼자 해먹기의 달인이 돼가고 있죠. 몸무게가 거의 톤급으로 가다가 한 석 달 반정도 동안 30키로쯤 뺐어요.


   그렇게 많이요? 건강은 괜찮아요?


   네. 운동도 같이 하니까.


   연극 얘기 말고 다이어트 얘기를 해야겠는데요. (웃음)


   생애 전환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스타그램에 이 과정을 올리고 있는데, 맨날 바쁘게 공연만 하는 모습 말고 제자들한테 좀 보여주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요. 이 사람이 삶에서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거? 스스로한테도 그렇고요. 공연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푹 빠져서 공연이랑 하나가 돼서 굴러가잖아요. 조금 벗어나고 싶었는데 계기가 필요했던 거죠. 며칠 술, 커피 끊고 그러 다보니까 에라 모르겠다, 이번 기회에 살이나 빼볼까, 하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굉장히 일을 많이 하시죠. 윤민철 하면, 정말 바쁜 사람, 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시잖아요. 영상, 음향, 기술 감독, 연극뿐만이 아니라 장르도 엄청 다양하게 하시고, 뭐 하시는 분입니까?


   사적인 자리에서 가끔 이런 얘기해요. 돈 버는 순으로 얘기해야 되느냐, 아니면 흥미 순으로 얘기해야 되느냐. (웃음) 흥미 순으로, 제가 얘기하고 싶은 대로 꼽으면, 연극하는 사람이죠. 


대학을 연기과로 갔는데 별로 재미가 없어서 밴드 생활을 했어요. 노래를 했는데, 한량이잖아요. 뭔가 기능적인 걸 하고 싶다, 돈도 좀 벌어야 했고. 그래서 음악이랑 가장 비슷한 분야가 뭐가 있나, 고민을 했죠. 아직 학생이었는데 음향 장비 렌탈 회사를 들어갔어요. 너무 기능적인 일이라 재미도 없고 배울 것도 별로 없어서 오래는 못 있었어요. 이후에 동숭아트센터에서 은근히 괜찮은 자리가 공지가 나서 지원을 했는데, 덜컥 뽑혔어요. 동숭아트센터에서 음향감독으로 출발을 한 거죠. 거기가 좋은 점이 음향 감독만 하는 게 아니라 음향 디자인 작업을 했어야 했어요 그래서 명함에도 음향 디자이너라고 적혀 있었죠. 처음 했던 작품이 <거기>였고, 처음엔 디자인이 아니라 오퍼레이터를 했어요. 기계도 만져보고 작업을 해보는데, 재밌고 잘 맞는 것 같았어요. 그때 주 5일제로 바뀌고, 일이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까 학교도 병행할 수 있겠더라고요. 사실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다가 다시 돌아간 건데 이제 학교가 재미없어진 거죠. <거기>끝나고 나서 ‘생연극시리즈’를 바로 이어서 했는데 현장에서 이상우 선생님, 송강호, 유오성 등 막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나오는 극단이랑 작업을 하니까 너무 즐거운 거예요. 연기들도 너무 잘 하시고. 학교에서 하는 연극 봤더니 뭐지? 싶은 거죠. 어렸을 때니까, 현장 작업이 있 어보였고, 제가 좀 거만했죠. 그때 음향감독들은 AV직업이라 그래가지고 오디오, 비디오 둘 다를 다뤘어요. 프로젝터는 없었을 때니까, 녹화 같은 걸 담당하게 돼요. 그걸 왜 만져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음향감독 막내니까 카메라도 만지고, 실황 녹화도 뜨고 그랬어요. 그렇게 2년반 넘게 일을 했어요. 중간중간에 학교 작업으로는 음악감독을 하고. 밴드도 했고 곡을 쓸 줄 아니까. 젊을 때니까 나한테 주는 일이 다 재밌는 거예요. 거절 없이, 원래 피곤함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피곤함 없이(재밌게 일했죠).


   이게 대충 20대 중후반쯤 일인가요?윤그렇죠. 그 때 차이무를 만난 건 정말 좋은 기회였어요. 차이무를 만나니까 당연히 연우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그 많은 선배님들을 만나게 된 거죠. 문화예술 쪽이 막 활성화 되던 때라 다들 신났었죠. 술자리를 허구한날 하고, 너무 좋았고 재밌었어요. 


그러다가 대변혁의 시기가 오죠. 제가 좀 거만했던 시기였어요. 마치 연극을 다 아는 것 마냥. (웃음)“생연극시리즈” 끝나고 첫 번째 ‘연극열전’을 했어요. 28살짜리가 대학로 유수의 극단에서 감독님 칭호를 받는 거예요. 동시에 시기질투도 있었죠. 들어간 지 1년만에 진급도 되고 하니까 한참 경력 차이가 나는 선배들한테 보기 안 좋았겠죠.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근데 저는 내가 얻고 있는 그 모든 게 당연하다, 고 생각했어요. 암울했던 시기였었죠.(웃음) 작품적으로는 되게 좋았어요. 젊을 때니까 막 시키잖아요. 싸기도 하고, 공짜로 하고,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니까 굳이 돈 달라는 소리도 안하고. 들어오는 작업 거절 안하고 막 다 했어요. 그러다 저의 자만과 주변의 시기질투가 어느 피크점에서 딱 부딪혀서 그만두게 됐어요. 


이제 뭐하지, 고민하다가 국제공연예술제에서 해외팀 음향 감독을 맡게 돼요. 오스트리아인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외국에서 온 팀이랑 작업에서 처음 들어보는 사운드를 경험한 적이 있어요. 어떤 애가 컴퓨터 하나 달랑달랑 들고 와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연결만 해달라는 거예요.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객석에 같이 앉아서 들어보는데 “어?!” 이렇게 된 거죠. 그 친구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라고 자기를 소개했거든요. “뭐야? 너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운드에 너무 놀란 거죠. “나도 컴퓨터 잘 하는데 혹시 이런 거 배우려면 네 나라에 가서 배워야 돼?” “아니야, 네 나라에도 있어.” 그래요. 그런 걸 배울 수 있는 대학원을 알아봤어요. 돈이 없어서 외국 나갈 생각은 못하고. 학교가 몇 개 있더라고요. 그 중에 한 군데를 택했는데 컴퓨터 음악 작곡 쪽이었어요. 무용 공연 중에 보면 이상한 노이즈 같은 거 음악으로 쓰잖아요. 그게 제 전공이에요. 가끔 누가 물어보면 소음, 잡음 전공했다고.(웃음) 지원은 했는데 학부 성적이 너무 말도 안되니까 서류에서 떨어졌어요. 근데 전화가 왔어요. 앞에 몇 명이 그만두면서 기회가 생겼다, 성적이 너무 안 좋은데 네가 써서 낸 서류를 보니까 네가 뭘 하려는지 보인다, 그게 좋아서 널 뽑는 거니까 들어와서 진짜 열심히 해야 된다, 그래요. 제가 워낙 하고 싶은 걸 장황하게 써서.(웃음) 따지고 보면 백남준 아트를 배우는 데인데, 클래식, 미디 쪽 친구들이 많이 지원을 했는데 전공에 대해 잘 몰랐던 거 같아요. 


오디오를 계속 배우 다보니까 어떤 한계점? 좀 재미가 없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다른 종목으로 가볼까? 싶었죠. 표현이 조명으로도 될 수 있고 무대로도 될 수 있고, 아, 영상으로도 될 수 있겠네, 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백남준 아트를 (좇아가겠다)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백남준도 피아노 전공인데 비디오 아트를 한 거잖아, 그럼 나도 할 수 있는 ‘거리’가 있겠다, 나도 비디오로 한 번 풀어볼래, 그러고서 그때부터 미디어아트로 완전히 전환을 해서 공부를 했어요. 분야도 바뀌고 한창 흥미진진해하고 있을 때쯤에 돈이 떨어져요.(웃음) 컴퓨터 음악을 하면 돈 드는 일이 좀 많아요. 조교 생활도 하고 장학금도 받고 학교에 들어갈 돈은 없는데 생활비가 떨어진 거죠. 


1년 다니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음향감독으로 잠깐 돈 벌러 들어갔어요. 2년 동안 있으면서 학생이었던 박해성, 동이향, 성기웅 연출을 만나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거기서도 좀 익숙해지니까 대학원을 같이 다닐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또 병행을 하게 됐죠. (웃음) 한예종에서 되게 다양한 것들을 접했어요. 미술원, 전통원, 여러 가지를 보러 다녔죠. 그때 전통원을 만난 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던 것 같아요. 김덕수 선생님을 만나면서, 그 분은 모르시겠지만, 영향을 크게 받은 게 있어요. 이런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너무 서양 것만 하려는 게 재미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 거죠. 대학원에 여러 외국인 친구들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한국 악기 중에 연주할 수 있는 게 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뒤통수를 빡 맞는 것 같았어요. “너는 기타도 치고 피아노도 치는데 왜 네 나라 악기는 하나를 못해?” 그러는데 되게 충격이었어요. 음악 하는 애가 지네 나라 악기 하나 못 다루고 그 룰조차 모른다는 게 되게 많이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겉멋 잔뜩 든 서양지향에서 생각의 변화가 좀 생겼죠.


잠깐 쉬는 시간.


   학원 졸업하고서 현장에서 한 1년 동안 음향감독, 음악감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종편이 생겼어요. 방송에서 절 부르더라고요. 갔는데 별 일 아니었어요. ‘안녕하세요” 같은 프로그램 보면, 출연자 뒤쪽 화면에 사연 목록 쭉 나오고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백판 만드는 일이었어요. 우리 공연 쪽 일에서는 대단한 순발력이 아니라 그냥 하는 정도인데, 방송 쪽에서는 제 작업 속도랑 대응력에 놀래더라고요. 우리는 공연 코앞이면 당장이라도 바꿔야 되잖아요.(웃음) 순발력 있게 빨리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그렇게 방송을 일 좀 많이 하게 되고, 행사, 콘서트 쪽에서도 일이 들어오고, 이 시기에 제가 하는 일이 확 넓어졌죠. 


공연 쪽에서 제가 영상 작업을 한다는 게 많이 알려진 건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의 영상기술감독을 하면서였어요. 당시에 피디님이 영상 쓰는 것에 우려를 많이 하셨는데, 저는 다른 장르에서 늘 하던 일이었으니까, 별 걱정 없이 하겠다고 했죠. 작품도 잘 나오고 미디어랑 연극이 같이 가는 이질감도 많이 줄었고, 고맙게도 무대디자인 한 여신동이 상도 받고 이래저래 복이 터졌죠. 음향감독 경험이 있으니까 극장에 대한 이해도 있고 영상작업도 하고, 그렇게 공연 쪽에 영상으로 다시 알려졌어요. 극단들마다 저를 다 다르게 알아요. 76극단에서는 음악감독으로 알고 있고, 어느 극단은 음향 감독으로, 어느 극단은 영상감독으로, 어떤 데는 다 하잖아, 그러고.(웃음) 지금은 영상 일이 9, 음향 일이 1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고맙게도 여러 기회들을 주시니까. 제가 작품을 거절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정말 모든 게 자연스러웠어요. 제가 뭘 이렇게 하고 싶어, 방향을 설정해서 온 건 별 없는 것 같고, 자연스럽게 이렇게 왔어요. 그래도 한 가지는 있죠. 

나이를 먹고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나중에는 이런 작품을 하고 싶다, 이런 게 하나둘씩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이래저래 아픔들도 생기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연출님이 돌아가신다든지. 그런 계기로 또 하나의 변화를 모색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신호 연출님 돌아가셨을 때가 너무 충격이었어요. 돌아가시기 한 4일 전에 전화가 와서 이런저런 작업을 하자고 하셨거든요. 좋은 환경의 프러덕션에서 작업하시게 돼서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요. 좋습니다, 화이팅, 그러고 전화를 끊었는데, 4일 뒤에 전화 통화를 했던 그 똑같은 버스정류장에서 부고 메시지를 받았어요. 심경의 변화가 많이 왔어요. 뭔가를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이제 기반도 좀 쌓였고, 룰도 좀 알겠고. 그러면서 연출을 하게 됐어요. 제가 다녔던 대학원에서는 졸업작품으로 증빙공연을 꼭 해야 돼요. 여러 개의 음악 작품을 묶어서 공연을 하는데, 제가 연극 배우를 몇 명 캐스팅 해서 중간중간 브릿지를 만들어서 극형식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너무 재밌었나 봐요. 우리 작품이 그렇게 재밌을 수 있는 거냐,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거냐, 사람들이 되게 놀란 거예요. 계속 소음 나오고 알 수 없는 동작 계속 해대고, 그러면 당연히 지루하잖아요. (웃음) 저는 그게 너무 싫었거든요. 졸업 공연 이후에 그걸 모티브 삼아서 ‘장님에게 소리 보여주기’를 주제로 몇 번 공연을 했어요. 이제는 너무 바빠져서 제 작품을 할 수는 없고, 그게 목표도 아니에요. 그냥 그 때 원하는 걸 하는 거 같아요. 무언가를 하고 지나고 보면 좋은 게 아니라, 할 때가 제일 재밌죠. 


일을 정말 많이 하긴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있어요. “연극하려고 돈 버는 거야. 돈 벌려고 연극하는 거 아니야.” 가끔 연습하다 보면 누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쉬었다 하자.” 이런 말 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연극은 먹고 살자고 하는 거 아니야. 밥이랑 연극이랑은 연결시키지는 말자.” 그래요.(웃음) 외국의 극단들 만나봤는데 그들도 비슷하더라고요.


   맞아요. 연극해서 못 먹고 살죠. 예전에 저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연출이 극단 운영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연극만 해서 극단 식구들 먹고 살 수 있는 방법 없냐고. 제가 그랬어요. “아무리 내가 연출 경험이 없어도 그거 하나는 알겠다. 그런 방법은 없다”(웃음)


제가 물어보고 싶었던 걸 거의 한 번에 쭉 다 얘기하셨어요.


   그렇죠.


   얘기를 듣다 보니까 아까 다이어트 얘기도 그렇고, 일 엄청 많이 하고 막 바쁘게 지내시다가 뭔가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쉬는 게 나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기 직전, 프리랜서를 곧 앞두고 있는 한 달 동안 너무 불안한 거예요. 나는 연극이 하고 싶은데, 연극하는 사람들이 나를 안 불러주면 어떡하지? 근데 모든 건 노력여하와 내가 들이는 시간, 이런 게 해결을 해주더라고요. 이 동네에 있다 보니까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고. 불러주면 고맙죠, 다. 주변에서 같이 작업하던 사람들이 다들 잘 돼서 좋고요.


   하는 일은 굉장히 다양한데 연극을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영상이나 음향 작업을 할 때 무용 같은 건 과감한 표현을 할 수 있는데 연극은 어떻게 보면 되게 제한적이잖아요. 무용에서는 막 노이즈도 쓰고 그럴 수 있지만 연극은 대부분 사실적인 소리를 많이 필요로 하고요.


   연극이 제약은 되게 많아요. 그래서 그런지 그 와중에 제가 잘 하는 것 하나라도 잘 표현됐을 때의 희열이 있어요.


   마지막 연극데이트 공식 질문입니다. 윤민철한테 연극이란?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른 것 같은 무언가. 제가 동이향 연출이 쓴 글을 배우가 읽어주는 걸 너무 좋아해요. 번역극에서는 절대 못 느끼는 건데, 그걸 듣고 있으면 많이 와 닿아요. 그 글 중에 “나 지금 아픈 거잖아. 아프니까 약을 먹는 거잖아” 라는 말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작품에 허언증이 있는 인물이 나와서 “우리 집에 황금송아지 있어” 그러면, 주변 인물들이 나쁘다고 하잖아요. 사실은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런 건데. 동이향 연출 글에서는 그랬어요. “이건 아픈 거잖아, 나쁜 게 아니라. 아픈 거니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거 아냐.” 그게 너무 마음에 안정감을 주더라고요. 내가 지금 연극이라는 걸 하고 있는데, 연극으로 되게 치료를 받고 있구나, 생각을 해요. 밥 얘기도 이런 맥락인 것 같아요. 연극할 때 작품에서 나오는 힘, 메시지, 그런 거에 홀딱 빠지게 되는 거죠.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윤민철(미디어 아티스트)

주요작품
<내가 장롱롱메롱문 열었을 때> <떠도는 땅> <코리올라너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어느 날 문득> <네 개의 문> 외






부새롬 연출가, 무대디자이너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뺑뺑뺑>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외

puro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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