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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Apr 07. 2017

모든 몸은 할 말이 많다

춤을 추며 나이 든다는 것은 또는 나이 든 몸으로 춤춘다는 것은


프롤로그: 자유부인의 후예들


지인이 한 명 있다. 나보다 서너 살 위니까 이미 60대를 넘어선 여성이다. 평소 그녀에게 특별한 느낌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조금쯤은 진지하게 토론할 때도, 일상사를 조잘조잘 이야기할 때에도, 톡 쏘는 삶의 통찰력이 엿보인다거나 주목할 만한 유머를 발휘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어떤 비밀 아닌 비밀 하나를 털어놓은 뒤, 내게 그녀는 매우 흥미롭고 궁금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모든 평범함이 갑자기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두른 듯 지극히 풍요롭고 느긋한 쾌락의 뽀얀 은가루로 빛났다. 자, 그 비밀 아닌 비밀이란? 그녀가 남편과 커플로,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커플들과 함께 매주 한 번씩 모여 미러볼이 내쏘는 야한 총천연색 불빛 아래 거침없이 춤을 춘다는 것이다. 추고 웃고 또 추다 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고 했다. 오로지 춤을 추기 위해 만난다는 것이다. 그룹 멤버 중 한 사람이 자기 집 거실을 개조해서 넓은 홀로 만들고 벽 하나를 전부 거울로 바꾼 다음 천정에 미러볼을 달았단다. 평생 춤을 배워본 적도 없고 리듬을 품고 있는 몸도 아니어서 춤에 대한 욕망을 품어본 적도 없었고, 책만 끼고 살아 뻣뻣하기 그지없는 몸이라 허리를 굽혀 손을 땅에 짚기조차 쉽지 않았단다. 


그런데 은퇴를 몇 년 앞두고 누군가가 들려준 콜라텍 이야기가 ‘유치하고 저질 같아’ 보이면서도 솔깃해서 필드워크 하는 심정으로 한번 들러보았는데, 그곳에서 ‘절대 빼앗길 수 없는’ 노년의 권리인 양 행복에 겨워 춤추는 이들을 보았단다. 샤방샤방한 옷을 입은 여자들과 정장을 차려입고 신사연하는 남자들이 서로 잘 보이려 애쓰며 흥분과 땀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문득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었단다. 그렇게 해서 춤 모임이 꾸려졌다. 새삼스레 정식으로 춤을 배울 필요가 뭐 있냐며 주위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핫한 음악들을 틀어놓고 ‘아무렇게나 몸이 원하는 대로’ 막춤을 춘다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자유와 해방과 ‘쾌락’을 선사받는 이날을 중심으로 일주일이 원을 만든다고 했다. 미러볼 불빛 아래 총천연색으로 빛날 그들의 흥분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상상하노라니 나조차 심장이 붉게 뛰는 것 같았다. 


그녀의 비밀 아닌 비밀을 들은 뒤로 나는 노후준비나 ‘아름다운 노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춤바람’을 첫 번째 목록으로 꼽는다. 일단 눈을 뜨고 나니 주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춤바람 난 사람들이 속속 출현한다. 피가 뜨거운 십 대나 젊은이들에게는 춤이 의당 일상이려니와, 몸의 리듬감이 둔해지는 4-50 대부터 작정하고 춤바람 난 사람들은 흥미롭고 행복하고 자신만만하다. 이들이 풍기는 여유작작이라고 할 만한 도취의 느낌도 좋다.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대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는 말도 듣기에 좋다. 어느 날 문 닫을 시간쯤 찾아간 한 콜라텍에서 떼로 쏟아져 나오던 장년, 노년들의 그 쾌락에 취한 얼굴들도 잊히지 않는다. 좀 더 많은 중장년, 노년 여성들이 춤바람 나라고 주문이라도 외울까 싶다.


그녀들의 춤추는 몸, 아름다움으로 혁명하다


내게 아트나 문학, 영화와 달리 춤 공연의 향유란 잊어버린 또는 잃어버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분명 내재해 있을 텐데 발현시키지 못하는 몸의 언어를 막연하게나마 떠올리는 기억 여행 같은 것이다. 또한, 몸이 해부학적·문화 사회학적 구조물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의미를 품고 있는 잠재적 언어 저장소임을 확인하는 아주 특별한 계기다. 춤 공연을 보면서 거듭 품어보는 소망, 즉 제대로 서고, 앉고, 눕고, 걷는 몸의 단단한 존재감을 넘어 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몸으로 구현해보자는 다짐은 단순히 건강을 위해 꾸준히 몸을 단련하자거나 몸의 표현력을 기르자는 소망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모든 안무가나 무용수들이 강조하는 속도, 호흡, 에너지의 흐름, 리듬 등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춤은 기호체계로서의 활자 언어가 도달하기 힘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춤 공연을 볼 때마다 나도 ‘그곳’에 가고 싶은, 무용수들의 몸이 지금 수행하며 맛보고 있는 그 통합적 몰입과 주이상스(jouissance)에 동참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곳’은 아무리 정교하게 전략을 짜도 아무리 난폭하게 발버둥 쳐도 우리를 결국 낚아채고야 마는 기호체계가 더 이상 전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곳이다. 물론 춤의 언어도 문화사회학적 소통 규칙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종종 미세한 동작들, 큰 움직임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상투적 관념과 이데올로기를 마주치기도 한다. 젠더 관념은 그중에서 제일 심각한 상투성을 보인다.


고전발레에서부터 현대무용에 이르기까지 단연코 ‘무용’을 구현하는 건 여성이 절대다수인데 ‘무용’이 무엇인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무엇이 ‘무용’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지 등에 대한 판단에서 젠더 관점은 과연 얼마큼 유효한지 빈번하게 질문하게 된다. (특히 여성 무용수의) ‘아름다운 몸’과 여성성, 섹슈얼리티의 연관성에 대한 주류 문화사회의 지배적 표상이 여전히 집요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데 그것을 구현하는 훈련된 몸의 기예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날 때 그 모순을 어찌하랴! 상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립현대무용단의 <11분> 공연을 볼 때 나는 이 모순에 당황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무용에서 미학의 내파를, 그리고 미학이 위치해 있는 상징계의 균열을 기대한다. 무용은 춤추는 그 사람의 몸 이외에 다른 매개체나 도구, 수단이 필요 없는 예술 행위이며, 몸 정체성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며 파격적인 자기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컨템퍼러리 무용은 음악뿐 아니라 무대 건축물, 조명, 영상, 오브제 등 다양한 매개물들을 이용한 탈경계적 형식에 익숙하지만 무용의 본질은 춤추는 몸이다. 이 몸은 세상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살이를 몸으로 살아내는 인간의 고뇌와 갈등, 희로애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무용수들이 상체를 벗고 혹은 전라로 무대 위에 등장할 때 그 필연성도 여기에 있다. 이 춤추는 몸은 쉼 없이 유한한 몸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질문하게 하고, 젠더화된 사회적 제스처나 활자문화를 비롯해 모든 기호체계의 규범성과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무리 잘 계산된 동작 연결이나 움직임의 흐름이라도 지금 여기에서 춤추는 무용수의 몸은 늘 어떤 과잉, 경계 넘기, 예기치 않았던 발화로 이끌린다. 


완벽한 미의 정형성을 추구했던 고전발레를 넘어 당대에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표현과 발화는 몸과 몸 정체성의 구성적 성격을 일깨운다. 절대 빈틈없이 완벽하게 동일성의 체계로 수렴될 수 없는 몸 언어의 비체계적 속성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문학이나 아트에 비해 (더욱 전문적인) 무용이나 (보다 인류학적으로 광범위한) 춤이 미학 내에서 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이 ‘취약점’이야말로 무용-춤이 크고 작은 인식론적 파장이나 심지어 혁명의 전위가 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제도적 전문성을 강조하는 (다분히 서구의 ‘아름다운 무용/수’를 전범으로 삼는) ‘무용’이 문화인류학적 맥락에서 집단적 놀이문화와 흥, 그리고 개인의 자기표현에 주목하는 (광의의) ‘춤’으로 보폭을 옮기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안은미 등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류학적 맥락에서 ‘춤’을 만들고 추고 전파하면서 춤의 해방적이고 번복하는 경계 넘기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안은미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보고 온 날 나는 집에서 막춤을 추며 내 몸이 말하게 했다. 며칠 동안 내내 혼자 막춤을 추며 흥겨워했다. ‘막춤’ 추는 할머니들을 춤 공연에 주요 행위자로 등장시키면서 안은미가 강조하는 것들, 예컨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물성이나 질감 그리고 시간성, 살아온 만큼 추는 춤, 그 살아낸 삶이 내뿜는 에너지 등은 무용의 한계를 춤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내파시킬 때 꼭 필요한 인식론적 지점들이다. 


“주름진 몸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삶이 체험한 책이었고, 춤은 대하소설 같은 역사책이 한순간에 응축해서 펼쳐지는 생명의 아름다운 리듬이었다.”는 안은미의 말은 노년들의 생애 구술사를 그 어떤 역사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키비스트의 태도와 연결되고, 모든 살아낸 몸은 수많은 시간과 장소, 경험을 보관하고 있는 아카이브라고 말하는 몸 정체성 이해의 관점과 연결된다.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이다. 구어는 문자나 말이 아닌 몸의 표현 언어에 주목하는 무용-춤에서 이러한 태도는 더욱 정치적이다. 그만큼 무용계가 기대하고 용인하는 몸의 표현력은 보수적인 규범성에 갇히기 쉽기 때문이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본 나의 반응은 라시드 우람단의 <스푸마토 Sfumato>에서 단련된 여성 무용수가 보여준 몸의 능력을 보며 감탄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때 나는 쏟아지는 폭우 아래서 빠른 속도로 돌고 또 돌던 그녀의 몸과 속도, 힘에 압도당했다. ‘훈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증언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탄은 ‘결코 따라 하지 못하리’라는 분명한 자각이기도 했고, 공연장을 나서는 나는 한껏 위축되어 있었다. <스푸마토>에서 그 젊은 무용수가 보여준 ‘능력’은 아마도 전문 무용수로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 이미 꽤 나이 든 무용수들에게도 위축과 소외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훈련해도, 자신을 믿어도, 통찰력이 있어도 일정 나이가 되면 ‘더는’ 가능하지 않은 몸의 능력이니까. 뛰어난 무용수를 언급할 때 흔히 등장하는 ‘40대까지도 무대에서 춤을 춘’이라는 말은 이러한 몸의 시간적 정황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환기해야 할 것은 몸의 시간성을 품는 춤의 이해다! 미학은 곧 정치학이라는 깨달음이다! 삶의 굽이굽이를 품고 있는 몸이 말하게 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는 몸, 죽음을 ‘향해’ 현재적 삶을 충일하게 살아내는 몸을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요청한다. 늙어가는/늙은 사람에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울 것, ‘아직도’ 늙지 않은 몸과 삶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연령주의-미 산업의 음험한 책략은 여성들의 삶을 왜곡시키고, 자기 멋대로 마음껏 늙어갈 기회를 박탈한다. 이러한 사회문화 환경에서 늙어가는 몸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춤을 추는 여성/무용수들은 몸이 품고 있는 시간성과 역사성의 주름들을 한껏 펼쳐서 새로운 의미들을 부화시키는 전위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


에필로그: 춤추는 몸이 만드는 미메시스의 변증법적 나선형


미메시스를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은 미메시스의 이중 방향을 언급한다. 어린아이들의 놀이가 공포의 대상을 닮음으로써 원초적 경험의 공포를 극복하는 뛰어난 방식인 것처럼 미메시스는 미메시스의 주체를 미메시스에의 강압에서 해방시킨다. ‘아첨하면서 닮아가면서’ 그러나 닮음을 강요하는 규범이나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바로 이 미메시스 측면의 내재적 목표다. 미메시스는 또한 표현된 것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을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강요된 표현과 닮음을 해체하고 억압된 표현을 드러내는 것, 춤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미메시스 측면을 다 감지하고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신비주의적 실체화도 아니며, 전달 가능한 것을 자연주의적 의미에서 복제하는 것도 아니다. 늙어가는 여성 무용수들의 춤이야말로 여성성이나 여성성의 신비주의적 실체화, 또는 젠더화 된 ‘아름다운 무용/수’ 이미지에 맞서 춤 자체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고전발레에서 현대무용으로 혁명적 도약을 이룬 여성 무용수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정치적 혁명이다. (제발 노년으로, 뚱뚱한 몸으로 ‘분장하지’ 말고, 부디 노년으로, 뚱뚱한 몸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맘껏 춤추시라!)              





김영옥_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 『노년은 아름다워: 새로운 미의 탄생』 저자. 독일 RWTH 아헨대학교에서 <타인의 텍스트를 통해 본 자화상: 발터 벤야민의 카프카 읽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문화이론을 연구하고 이미지 비평을 포함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 실천하는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부터 나 자신과 친구, 이웃의 노후준비로 노년과 노년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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