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예술의 대중화’ 정책의 역사는 사실 오래되었다. 서울시가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 운동장, 사무실 빌딩 근처에서 각종 문화예술 공연이나 전시회를 개최하는 ‘문화 대중화 운동’을 펼칠 계획이라는 기사가 나온 게 1995년이다.(중앙일보, 1995. 10. 1. '서울시 문화 대중화 운동 전개-내년부터') 그동안 순수예술지원에 치중했던 문화정책에서 일반시민과 저소득 계층이 쉽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전환한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20년이 넘은 2017년에도 ‘예술의 대중화’는 진행 중이다. 탑다운 방식의 엘리트 중심주의라는 비판도 있지만 소위 고급 예술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은 계속되어왔다. 최근에는 상업화와 저급화에 대한 우려로 조심스러웠던 공공영역에서 먼저 새로운 시도를 하고 민간과 손을 잡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문화향유율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민의 3분의 2는 순수예술을 멀리하고 있다. ‘2016 문화향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1년간 문화예술행사 직접 관람률은 78.3%로 2014년보다 7% 증가했다.(서울시는 81.6%로 전국 평균보다 높다.) 그러나 ‘영화’와 ‘대중음악/연예’를 제외한 순수 예술행사 관람률만 보면 절반 이하인 34.4%이다. 분야별로는 전통예술 7.6%, 서양음악 4.5%, 무용은 1.3%에 불과하다. 미술 전시회 관람률만 12.8%로 2014년 대비 2.2% 증가했고, 평균 관람 횟수(0.29회)도 2배 이상 높아졌다.
국민들은 저렴하면서도 수준 높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예술 행사 관람의 걸림돌은 비용이 많이 들고(31.9%),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고(26.2%), 관심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14%)이다. 문화예술 행사 관람 시 ‘예술 행사의 내용 및 수준’(31.5%), ‘관람 비용의 적절성’(25.2%), ‘접근성’(12.6%) 등이 중요한 선택 기준이라는 답과도 연결된다. ‘2016 국민 여가활동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1년간 국민들이 가장 많이 한 개별 여가활동은 TV 시청(46.4%)과 SNS를 포함한 인터넷(14.4%)이다. 가장 많이 참여한 유형별 여가활동은 휴식이 56.7%로 가장 많았고, 문화예술 관람과 참여 활동은 각각 0.8%로 1%에도 미치지 못했다. TV와 영화, 인터넷에 가 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공공영역의 정책 방향은 ‘수준’을 높이고, ‘비용’ 부담을 덜고, ‘시간’과 ‘거리’의 제약을 없애고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공공 공연장과 단체들은 리허설 현장을 공개하고 공연장 로비에서 음악회를 개최하고, 백 스테이지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시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공연 영상화’는 공연 선택의 기준인 ‘가격’, ‘작품의 질’, ‘접근성’ 3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며 주목을 받고 있다. NT Live(National Theatre Live)는 영국 국립극장이 연극계 화제작을 촬영해 전 세계 공연장과 영화관에 생중계 또는 앙코르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2014년 3월부터 NT Live를 국내에 선보이고 있는 국립극장은 올해 2월 <프랑켄슈타인>과 <제인 에어> 두 편을 상영해 객석을 가득 채웠다. 최대 장점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저렴한 가격 (1만 5천 원)으로 한국에서 자막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것. NT Live 관람객 대상 설문조사 결과 64.6%는 1년에 최소 5회 이상 공연을 관람하는 기존 관객층이었지만 3명 중 1명은 NT Live를 보기 위해 국립극장을 처음 방문했다고 답했다. 새로운 관객층 유입에 효과가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국내에서는 예술의 전당이 최초로 시도했다.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은 서울과 지방 관객 간의 문화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예술의 전당 공연 영상화 사업이다. 서울 예술의 전당의 공연을 촬영해 고화질의 영상물로 제작한 다음 극장이나 지방 문예회관 등에서 상영한다. 2013년 11월부터 시작했는데 이는 NT Live 국내 상영보다 앞선 시점이다. 주로 국립예술단과 예술의 전당 기획 공연이 대상이었고, 최근 민간 주최의 공연도 추가하고 있다. 상영 장소의 조건도 중요하기 때문에 영사기(프로젝터)와 스크린, 음향 설비를 갖춘 전국 문화예술회관의 신청을 받아 심사를 거쳐 영상물을 배포한다. 지난 12월에는 예술의 전당 공연 3개를 전국 9개 상영처에서 실시간으로 상영하는 ‘SAC LIVE’를 시작했다. 굳이 서울에 오지 않더라도 거주지와 가까운 공연장에서 예술의 전당 공연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녹화 중계뿐 아니라 실황 중계도 점차 늘려나간다는 방침이다. 2017년 3월 기준 총 24 작품을 영상으로 제작했으며, 지난 3월 14일부터 16일에는 2017년 선보일 9편의 신작 중 4편을 특별 상영했다. 2017년에는 창작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연극 <병동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페라 <라 보엠> 등이 스크린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수익 창출보다는 관람 기회 확대가 목적이라 무료 배급과 상영을 원칙으로 한다.
최근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비롯한 2016 공연예술 창작산실 우수 신작 공연 6편을 네이버를 통해 온라인으로 생중계했다. <레드북> 공연은 생중계 직후 티켓 판매율이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작품의 완성도를 확인한 관객이 티켓을 구입하는 관객 저변 확대 효과를 입증한 셈이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클래식을 어려워하는 시민들을 위해 2007년 5월부터 정기 공연이 있는 주의 월요일에 연습실을 개방해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전문 클래식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며 정기 공연 프로그램을 예습할 수 있다. 공연 예매자가 아니더라도 사전에 신청하면 누구나 참석 가능하다.
세종문화회관의 천 원의 행복 시즌 2 ‘온쉼표’는 공연장의 문턱을 낮추고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자는 취지로 양질의 공연을 단돈 천 원에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2007년 시작해 만 10년 동안 185회의 공연이 열렸고 누적 관객 약 22만 명을 기록했다. ‘천 원의 행복’을 통해 처음 공연장을 방문한 시민도 적지 않을 터. 입장료는 천 원이지만 공연의 수준은 높다. 서울시 예술단을 포함해 국내외 정상급 예술가들이 참여하며 클래식, 뮤지컬, 무용, 국악, 오페라 등 전 장르를 망라한다.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도 곁들인다. 매회 평균 경쟁률이 5대 1을 넘길 정도로 신청자가 많다. 2017년에는 3월부터 12월까지 21회의 공연을 진행한다.
‘감상하는 미술관’에서 ‘즐기는 미술관’으로의 변화는 공공영역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문화가 있는 날’에는 입장료를 할인해주면서 밤늦게까지 문을 열고, SNS와 ‘인증숏’ 시대에 맞추어 작품의 사진 촬영도 점차 허용하는 추세다.
‘미술 주간’은 미술 문화의 일상화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개최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미술 행사다. 2015년 시범운영을 시작으로 2016년에는 국·공·사립미술관, 갤러리,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서울·광주·부산 비엔날레 등이 협력해 운영했다. 미술관이 누구나 쉽게 찾아가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라는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무료입장 또는 할인, 체험 프로그램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2016 미술 주간’에는 비영리 전시 공간과 신생 공간 33곳도 참여했다. 전국 사립미술관 40곳에서는 전시 연계 포토존 이벤트 ‘좋아요 #미술관 스타 그램 ’을 진행했다. 각 미술관에 마련한 각양각색의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올리는 관람객들에게 추첨을 통해 기념품을 증정했다. 주최 측에서는 포토존 이벤트가 20~30대 젊은 층 공략에 효과적이었다고 분석했다. 참여 관객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이해도에 변화가 생겼다는 응답이 많았다. 2017년 미술 주간은 10월 13일부터 22일까지 10일간 열린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기존의 딱딱한 미술관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2013년부터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 달에 두 번 화요일 점심시간(오후 12~1시)에 열리는 ‘예술가의 런치박스’에는 매회 30~50명이 참가해왔다. 별도로 시간을 내기 힘든 미술관 인근 직장인들이 작가와 직접 만나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와 식사를 하며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매월 정해진 형식이 아니라 그 달의 작가가 직접 행사를 기획해 콘셉트에 맞는 미술관 내 공간을 정하고 음식 메뉴와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지난 2월 김가람 작가는 대놓고 ‘셀카’와 ‘인증숏’을 찍어 SNS에 올리도록 미술관을 꾸미고 관람객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이끌었다. 시민들은 작가와 함께 퍼포먼스에 참여하면서 현대미술과 미술관에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뮤지엄 나이트’는 저녁시간을 활용해 낮과는 다른 분위기의 미술관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기존의 미술관 야간개장 프로그램 ‘뮤지엄 데이’를 변경해 작년 4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매월 둘째, 마지막 주 수요일 미술관 야간개장 시간(오후 7~10시)에 방문하면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영화, 퍼포먼스,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다. 이 시간만큼은 작품을 설명해주는 오디오 가이드에서 큐레이터나 DJ가 직접 선정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예술가의 런치박스’와 ‘뮤지엄 나이트’는 2017년에도 매월 운영될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작가 미술장터 개설 지원사업’은 미술품 소장 문화 확산을 통해 미술의 대중화와 예술의 일상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작가 미술장터’는 기존의 아트페어와 달리 판매금액 전액을 작가들에게 돌려줘 작가의 작품 판로 개척과 창작활동을 돕고, 국민들은 미술품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장터이다. 고급 갤러리가 아닌 백화점, 은행, 카페, 동네 골목 등에서 장터가 열린다. 매일 가던 카페에서 생애 처음으로 미술작품을 구입할 수도 있는 것이다. 2016년에는 신세계백화점, 인터파크 시어터, 신한은행, 탐앤탐스 커피 등이 장소를 제공했으며, 10월 5일부터 12월 7일까지 12개 단체가 ‘창고형 아트 마켓’, ‘예술 쇼핑센터’ 등 대중들이 친숙하게 느낄 만한 타이틀을 걸고 장터를 열었다.
서울문화재단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아트 캠페인 ‘바람난 미술’을 진행했다. ‘전시장을 나온 미술, 예술이 넘치는 거리’를 슬로건으로, 영화관, 구청, 병원 등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열린 ‘찾아가는 전시’를 비롯해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과 오프라인 ‘그림 가게’를 운영했다. 현대미술은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문턱이 높은 갤러리를 나와 시민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어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연희문학창작촌에서도 이웃 문학다방, 연희 목요 낭독극장 등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낭독하고 독자와 만나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2017년에는 생활문화 지원단이 신설되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운영하던 ‘생활예술 오케스트라’가 재단으로 이관되었다. ‘생활예술 오케스트라’는 아마추어 음악인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꼽히던 세종문화회관을 전격 개방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제는 단순한 감상과 소비를 넘어서 일상 속에서 서울시민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대중의 예술화’를 지향한다.
‘예술의 대중화’는 공공영역이 안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순수예술은 콧대 높은 ‘그들만의 리그’로 인식되어 대중들이 외면한다. 관객을 끌기 위한 이벤트는 작품 자체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 관람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불만을 일으킨다. 지나친 사진 촬영은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가 되기도 한다. 무료 관람 정책이 그나마 있던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료로 볼 수 있으면 누가 돈을 주고 티켓을 구입하겠냐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일단 경험을 해봐야 예술 소비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정답은 없어 보이지만 공익을 추구하면서도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공공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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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민정
객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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