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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Apr 12. 2017

내가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노동, 연극

움직임배우 홍예원




블랙텐트 세운다고 광장에 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휘리릭 사라져 버렸네요. 한 편의 공연처럼.

예원
블랙텐트 자체가 뭔가 연극스럽... 아니, 아니 ‘연극인’스러웠던게...(웃음) 순식간에 모든 동력을 동원해서 뿌악~ !(현란한 손동작) 세우고 뽜악~! (중장비모양 손동작) 하고 딱! 끝나버렸달까?(웃음)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죠?

예원
작년 11월 4일이었죠. 광화문 광장에서 블랙리스트 기자회견 하던 날.


아! 텐트 다 찢긴 날!

예원
내가 왜 갔더라? 아! 그때 ‘대학로X포럼’ 페이지에 쓴 글(누가 썼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에서 꼭 와달라는 글귀가 되게 절박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지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 절박하게 참여하자고 하는데 나라도 가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그냥 간 것 같아요. (문득) 그날 광경이 되게 재밌었어요. 경찰들도 좀 당황하는 것 같더라구요. 보통은 노동자 분들 혹은 농민 분들이 단위로 뭉쳐서 충돌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들이 웬만하면 있는데...(웃음) 누구는 텐트 안에 들어가서 질질 끌려가고, 누구는 뒤에서 노래 부르고, 누구는 경찰들 앞에 앉아서 책 읽고,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웃음) 그런 장면들이 많이 기억이 나요.


맞아요. 저 포함 몇몇 연출님들 많이 안 싸워본 티내면서...(부끄) 누구는 끌려가고. 모 작가님은 텐트 안에 들어가 있다가 텐트 째로 끌려가고, 가서 빼온다고 뒹굴고. 하하, 그때는 엄청 심각했는데... 참, 난리도 아니었죠.(쓴웃음)

예원
그날 모인 사람들끼리 식사하면서 긴급 심야회의 제안하고, 검열백서 얘기 등등이 나왔었죠. 저는 그렇게 여러 일들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블랙텐트. 어떤 ‘기억들’ 인가요?

예원
블랙텐트는 연극인들의 힘만으로 세워지진 않았죠. 거기서(광장) 아주 긴 시간 투쟁을 이어오신 많은 분들의 힘으로 세워진 거라고 생각해요. 촛불의 광장에 그 큰 배(블랙텐트)를 띄우기 위해서, 십 수 년 전부터 사회변혁을 위해 계속 움직이던 분들. 그 분들의 힘으로 가능 했던 것 같아요.


긴 시간 적극적으로 함께 일 할 수 있었던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동력은 어디에 있었나요?

예원
블랙텐트 하면서는 어떤 부채감이나 책임감으로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일에 매달려서 하게 된 이유나 동력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런 동력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고 얘기하게 되더라구요.(웃음)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했달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또 심정적으로 뭔가 몰입할 대상이 필요하기도 했고. 물론 처음에는 힘든 부분도 있었는데 그 때,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알아서 내가 할 부분을 먼저 맡아서 하고, 그러다보니 나중엔 자연히 상황에 맞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내가 하고 있더라구요.(웃음)


블랙텐트 하면서 공연들 많이 보셨잖아요.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어떤 순간 제일 기억에 남으세요?

예원
(망설임 없이) <씻금>! (연희단거리패 공연) <씻금> 첫 날.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냥 처음 볼 때는 한 많은 한 여자의 삶을 그려내는 공연인가 보다 하고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배우분이 ‘저기서, 누가 오네!’ 그 순간 알았어요. 손으로 가리킨 블랙텐트 극장 입구 너머에 세월호 분향소가 있잖아요... (사이) 순간 와르르 다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장면이 그 장소에서 내 앞에서 일어났을 때. 정말 무언가가 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어서. 미안하고 속상하고 죄스럽고... 그런 느낌들. 경계들이 허물어지는 경험이었죠.


저는 <씻금> 공연을 그 다음날 봤는데 소 20마리 묻고 너무 답답해서 오셨다는 농민 분께서 울부짖으시고 배우분이 진심으로 토닥여 주셨어요. 울컥 하더라구요. (갑작스레) 얘기를 나누다보니 작업할 때 퍼포머로서 혹은 작업자로서의 감각들은 어떤지 알고 싶어지네요. (머쓱) 어떤 작업들을 어떤 감각으로 해왔는지.



예원
저는 사실 미대를 나왔어요. 조각전공. 미술을 되게 잘하진 않았어요. 재밌긴 했죠.(웃음) 인터뷰엔 할 수 없는 얘긴데, 제가 중학교 때 엄청 사고를 많이 치던 애였어요. 부모님께서 두 분 모두 직장을 다니고 계셨는데 제가 너무 사고를 많이 치니까. 이게 통제를 할 수 없는 거예요.(웃음) 학교 끝나고 뭐하고 돌아다니는지도 알 수 없고.


하하. 도대체 뭘 하셨을까? 하하. (어색한 웃음)

예원
뭐, 청소년이 할 수 없는 일들? 락 카페 다니고, 술 먹고 등등. (담담) 근데 사촌오빠가 우리 집 근처에서 미술 학원을 하고 있었어요. 엄마가 나를 거기다 집어넣은 거죠.(웃음)


갱생의 차원이네요.(웃음)

예원
그림을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시작해서 입시를 준비했죠. 예고를 알아보고 있을 때였나. 갑자기 다시 연극을 해야겠는 거예요.(웃음) 근데 중학생이 혼자 알아봤자 얼마나 할 수 있었겠어요. 연극이 하고 싶으니까 일단 미술을 그만 뒀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를 갔어요. 대학 진로 고민하면서 어쩌다 보니 다시 미술을 하게 되었지만.(웃음) 근데... 대학 다니면서도 뮤지컬이나 공연을 보러 가면 기분이 이상했어요.


내가 빨리 저걸 해야 하는데?(예리)

예원
그렇죠.(웃음)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나는 내 꿈을 이렇게 접을 것인가! 그러다가 ‘몸을 쓰는 뭔가를 해봐야겠다’ 하고 프랑스에 있는 학교를 알아보고 가게 된 거죠. 2007년 여름. 25살? 26살 쯤 이었던 것 같아요. 마임 학교를 2년 다니고 광대 학교에 1년 있었어요. 이후에는 원래 다니던 마임학교에서 어시스턴트 일을 했어요. 그리고 공연을 했죠. 친구들이랑 페스티벌 가서 공연하고, 거리에서 버스킹도 하고 극단이랑 계약해서 극장에서 3, 4개월 동안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친구들끼리 프로젝트 만들어 극장이랑 컨택해서 캬바레 같은 걸 열기도 했었죠.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행복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들어오게 되셨는지...

예원
우리나라는 대학로 바닥에서 20년 버티면 살아남는다고 하잖아요.(웃음) 근데 거기는 20년 까지는 안 걸려요. 한 3년? 5년? 버티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극단을 만들어서 작업을 하다보면 작품도 조금씩 완성이 되어가고 기회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굴러가게 되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 3~5년을 기다리면서 서류를 연장하면서 살아가야 했어요. 내가 외국인 학생신분 이었으니까. 거기서 계속 살려면 어떻게든 서류상 증명을 해야 하고 연장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렇게 버티기엔 조금 외로웠어요.(웃음)


어쨌든 5년을 프랑스에서 공연도 많이 하고 많은 것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텐데. 어떤 원대한 포부 같은 게 있진 않았나요? ‘내가 뭔가 공연으로 본때를 보여주겠다!’ 하는 (웃음)

예원
그러기엔 제가 귀국한 시기가 2012년 12월이었어요. 공연이고 뭐고 그 투표 결과가 나에게 준 충격이란....


아.... (깊은 탄식, 말을 잇지 못하는)

예원
내가 왜 돌아왔나. 내가 이 나라에서 살아도 되나.(웃음) 어쨌든, 내가 이 나라를 뒤집겠다. 이런 것 보다. 나는 그 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공연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소소하게, 그러나 부당하지 않게, 친구들끼리 행복하게. 이게 가능 할.... 라나? 아니더라구요.(웃음) 프랑스에서 아동극 작업도 했었는데. 아동극 작업이 훨씬 더 예민하거든요. 거기서는 확실히 그랬어요. 제가 겪은 바로는. 훨씬 더 공을 들이죠. 왜냐하면 어린이 관객과 부모관객을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하니까.
아동극 작업을 할 때 굉장히 뿌듯함을 느꼈어요. 성인극 보다 더. 근데 우리나라 와서 처음 아동극 움직임 연출을 했었는데 분위기가 이게 아닌 거예요. 크게 작품성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배우들을 대하는 구조(배우들이 부품처럼 교체가 가능한)도 그렇고. 놀랐어요. 이건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청소년극을 한 번 연출했었는데요. 원작 소설도 너무 좋았고, 배우들과도 즐겁게 작업을 했었어요. 근데 중고등학교 찾아가면서 학생들 만난다는 것이 굉장히 큰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구요. 평생에 한 번 뿐인 공연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의 삶에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죠. 그렇게 준비를 했던 공연인데 현장에서 몇몇 스텝들이 하루 하고 끝나는 행사처럼 공연을 말 그대로 ‘해 제 낄’ 때. 정말로 큰 회의감이 밀려왔죠. 연극하기 싫어지더라구요.

예원
맞아요...




그럼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으신지. 관객들이랑 어떻게 만나고 싶으신가요?

예원
내가 움직임을 배웠으니까 움직임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었어요. ‘나는 대사(언어 혹은 텍스트)를 사용할 수 없다. 배우로서나 연출으로서나.’ 근데 정작 나는 일상에서 어떤 생각들이나 떠오르는 것들이 있으면 문장으로 계속 풀어내고 있더라구요. 그러다 문득 ‘그럼 이건 글로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다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써보자. 그걸 내가 연출을 할 수 있을지 어떨 지도 아직은 모르지만.(웃음)


어떤 글을 써보고 싶으세요?

예원
(막힘없이) 해고. 해고에 대해서 쓸 거예요. 직장에서 당하는 해고만은 아니구요. 요즘은 대학생들도 해고 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학과가 학생들의 동의 없이 학교 측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없어진다거나 하는... 해고의 형태가 전염병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빨리 확산되고 사람들을 힘들고 아프게 만들고. 단지 해고를 당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마치 전염병 걸린 사람처럼 피하기도 하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해요.
사실 처음으로 내가 마음이 동했던 타인의 아픔이 쌍용자동차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 사건이 있을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렸고. 외국에 나가있었죠. 잘 몰랐어요. 노동자들이 당한 사건.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12월25일에 분향소를 방문했어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한테는 그 사건이 특별하고 크게 자리 잡고 있어요. 그 당시에 아무것도 지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몰랐고. 나중에서야 그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사나 이야기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죠. 이 세상에 그런 일이 이 사건 하나는 아니겠지만 저한테 이상하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사회적으로 부조리하거나 사람이 사람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거기서 출발하는 거죠.



프랑스에 오랜 시간 있었잖아요. 그 시간과도 관계가 있는 건가요?


예원
있죠. 프랑스에서 처음 본거예요. 정당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당당하다는 것. 모든 인간이 노동자고 모든 노동자가 자신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응당 누려야 한다는 것을 본거죠.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침해받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이건 여담인데. 프랑스는 워낙에 바캉스가 기니까 여름만 되면 파리 시내가 텅텅 비거든요. 대부분 여행객들이고. 근데 집 앞에 항상 있던 노숙자 아저씨가 일주일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는 절 한심하게 보더라구요. ‘너는 여전히 이 도시에서 일하고 있냐며’ 불쌍하게 쳐다보는 거예요.(웃음) 자기는 옆 동네로 바캉스 다녀왔다며. 맥주 사 먹게 돈 좀 달라며 뻔뻔(웃음) 혹은 당당하게 요구하더라구요. 그런 게 좋았어요.
그리고 돌아와서 보고 겪은 여러 광경들은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죠. 그렇게 내가 모르고 살았던 일들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뭔가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블랙텐트가 제게 특별한 이유는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서, 공연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훨씬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 고맙고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덕분에 늘 분향소나 투쟁현장의 먼발치에서만 봤던, 노동자분들과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고(웃음), 그 들의 일에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좀 더 열린 것 같아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가 글로 혹은 목소리로, 몸으로 표현하고 싶은 일이 일치되어가는 시간 같네요. (흐뭇) 자! 마지막으로 홍예원에게 연극이란?


나에게 연극은(혹은 공연은) 내 생존을 위한 나의 노동. 내가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노동. 공연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노동인 것 같아요.(웃음)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일. 나를 살게 하는 일.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홍예원(움직임배우)

주요작품
<티타니아-마법의 숲> <빛,날다-새로운 여정> <시간의 벽> 외



김정 연출가
'프로젝트 내친김에' 연출

주요작품 <광장의 왕>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꿈> <손님들> 외
shinji8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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