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성으로 명명되는 몸의 움직임들
▶ 리뷰_양은혜 / 공동 집필, 관객 인터뷰 정리_허윤경 / 사운드_최강희
▶ 본 리뷰에는 실제 공연에 쓰였던 대사들이 인용되었습니다. 공연의 텍스트들은 작품에 참여한 무용수들의 리서치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 본문 중간 중간에 있는 각주들은 사전적 해석이 아닌 공연에서 관객의 공간탐색을 위해 제공되었던 관객지시문과 사후 진행된 관객 인터뷰의 내용으로 연관성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스페이스-쉽>은 관객 이동형 공연으로 이틀간 진행되었으며, 회당 50여명의 관객들에게 40개의 각기 다른 지시문이 전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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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건축 두 번째 글은 공간을 신체의 감각으로 해석한 <스페이스-쉽> 리뷰와 무용리뷰에 대한 새로운 시도이다.
타 장르의 예술과 달리 작품발표의 결과물이 남지 않는 무용은 출판물과 기록, 비평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국내 무용계에서 리뷰어의 관점과 해석의 축적만으로 무용창작의 역사를 이루고 작품을 판단하고 심사평가하는 자료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리뷰를 시작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공연에서의 드라마투르그(Dramaturgy, 극작술을 뜻하며 연출법의 일종, 예술단체에 상주하는 비평가로 작품의 전 과정에 참여하여 이론, 실무에 대한 지식으로 작품 해석의 안팎에서 조율하는 자) 개념을 차용하여, 리뷰어가 작성한 리뷰에 안무가가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여 지면 구성 및 연출에 개입하는 형식을 시도해보았다. 작품의 2차창작물인 리뷰의 창작과 감상과정에서도 작품의 키워드인 #공감각에 중점을 두었다.
본 리뷰는 글을 통해 공연에 대한 기억을 회귀시키는 과거를 소재로 한 작업으로 본 원고의 상단에 Sound Q를 클릭하면 공연에 사용된 사운드를 들으며 리뷰를 감상할 수 있다. 또한 공연에서 사용되었던 나레이션 글귀들이 실려 있어 문장의 시제는 과거와 현재형의 혼합으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리뷰어의 글 중간에 창작자의 글이 삽입된 일종의 대화 형식을 시도해보았으며, 관객들의 짧은 인터뷰들도 삽입하여 관객 참여형으로 이루어지던 공연의 특성을 리뷰에 반영하였다.
공동작업으로 글을 쓰고, 배치하고, 수정하고, 또 기술적 한계에 부딪쳐 현실과 타협하기도 하는 일련의 작업과정은 안무를 구성하고 극장에 들어가 관객을 맞이하는 지점과도 겹쳐진다. 문장 사이의 호흡과 행간에서 움직임과 방향성, 공간을 발견하는 리뷰어 양은혜의 관점과 색다른 제안 덕분에, 어렵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리뷰의 대상이 되는 공연의 창작자인 동시에, 이 지면에서 또 하나의 공연에 ‘드라마터그’로서 어떤 역할과 수위로 접근해야 하는가에 집중했다. 창작자가 이미 공연으로써 한 발언을 수용하는 것은 온전히 관객 개개인의 몫으로 열려있다. 관객과 공연자가 공간 구분 없이 함께 있었던 이번 공연은 특히 그러했다. 창작자의 관점과 리뷰어의 해석이 ‘대화’의 구도 안에서 서로 독립된 거리를 유지하고, 그와 동시에 독자에게 공연을 상상하게 하는 단서들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리뷰를 중심에 두고 논평이나 설명이 아닌 감각적 단상이나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하는 방식을 택하였고, 관객 인터뷰 및 공연의 여러 요소들이 인용되었다. 여기에 소개된 관객 사례들 외에도 다양한 의견을 가진 관객 분들이 공연에 참여하였다.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둥근 돌 같은 것은,
울퉁불퉁 지면을 따라 굴러가기도 하고 멈춰있기도 한다.
지면이 푹 파인 곳이 있고, 그 푹 파인 곳의 크기와 깊이는 아주 다양하다.
마치 화산 폭발의 잔상 같기도 하다.
땅이 아예 갈라진 곳도 있지만 서로가 그리 멀지는 않다.
시작과 끝. 이제 다시 시작, 끝.
여러 길이의 시작과 끝이 제멋대로 가다가 길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작은 돌이 머물러 있거나 지나가는 시간, 지나가는 길이,
지나가는 속도에 의해 만들어진 듯하다.
문화역서울284 RTO에서 이뤄진 <스페이스-쉽>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 예술극장건물에서 여러 공간을 오가며 입체적으로 선보였던 초연과 달리 하나의 공간에서 이뤄진 작업이었다. 입체적인 공간, 계단과 복도, 건물을 이루는 각각의 공간을 선택해 관객이 다른 높이와 다른 거리로 바라보게 했었던 초연작이 한 공간에서 재구성 됐을 때 안무가는 그 입체감을 어떻게 살렸을까.
이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형상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티켓팅을 마친 관객은 오픈되어 있는 창문과 창문턱에 배치된 망원경을 통해 공연이 이뤄질 공간을 줌 인1) 하여 들여다볼 수 있다.
<스페이스-쉽>은 공간과 이를 감상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접미사로써의 ‘-ship’, 또는 익숙한 곳이 낯선 공간으로 경험되는 탐험공간으로써 선박의 ship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망원경으로 내부를 바라보는 관객은 그곳에서 일어날 사건을 상상하며 익숙한 공간을 망원경으로 달리 바라보고 개인의 경험을 끌어당겨2) 사유화한다.
티켓에 표기된 기호대로 안내자를 따라 다섯 명씩 그룹을 만들어 정해진 타이밍에 지정된 위치로 이동한다. 관객이 공연을 서로 다른 시간대부터 보게 된다는 점이 낯설다. 본 작업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극장공간에서 벗어나 퍼포머와 관객이 한 공간에 공존하며 이뤄지는 퍼포먼스로 관객은 전체공간의 일부로 인지된다.3)
하나의 공간이지만 그룹으로 서서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과 퍼포머들의 위치는 어느 순간 무너지는데 퍼포머들의 동선4)이 관객이 퍼포먼스를 관람하기 위해 향하던 내부 시선으로부터 외부 방향으로 이동되기 때문이다. 퍼포머가 관객 곁을 지나가고 뒤에 서면서 퍼포머의 에너지를 느끼게 될 때, 관객은 퍼포먼스의 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관객은 관람이 아닌 정지 혹은 멈춤이라는 동사로 대치된다.
나태하지만 긴장감이 함께 있다. 모양은 나태하나 운동성과 딱딱함에 의해 긴장감이 계속 되는 듯하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스치듯, 서로 다른 두 힘이 함께 있어서 주변을 이루는 공기의 흐름은, 공기의 모양은 달라진다.
퍼포머들의 움직임은 마치 갈 길을 잃어버린 듯 명확한 동작의 완결성을 짓지 못하고 머물거나 멈칫거리고 서성인다. 이러한 동선에서 신체의 불안정한 밸런스는 어느 순간 움직임에 집중했던 관찰의 힘5)을 풀도록 했는데 그 때 비로소 퍼포먼스를 통한 공간의 바뀐 장소성이 눈에 들어온다.
문화역서울284는 공간의 용도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극적 요소를 지닌 공간이다. 퍼포먼스가 이뤄졌던 RTO는 현재 복합문화공간으로 공연을 비롯한 다원예술 퍼포먼스로 사용되는 공간이지만 본래는 수하물도장으로서 승객이 출발역에서 수하물로 부친 짐을 도착역에서 찾아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군 수송부대가 이 공간을 사용하게 되면서 미군장병안내소(Railroad Transportation Office)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칭하던 명칭인 RTO의 약자를 현재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약 92년의 시간이 축적되어 한때는 수하물도장으로, 미군장병안내소로, 창고로, 복합문화공간으로 지내오면서 이 공간에 과거의 흔적6)들이 남아 있다. 벽과 바닥에는 오랜 시간 동안 보수를 위해 덧칠해온 페인트의 두께가 보인다. 내벽은 트였지만 각기 다른 공간이었음을 알게 하는 다른 패턴으로 구분되는 타일바닥, 공간의 힘을 받는 내력벽은 적층된 적벽돌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깨진 채 오랜 시간을 버텨온 흔적으로 극적효과를 보인다. 미처 완결성을 짓지 못하는 퍼포머들의 움직임은 용도가 바뀌면서 달라진 공간 내의 사라진 기능과 방향성으로 공명되어 관객의 몸 또한 함께 정지되고 흔들리도록 한다. 눈이 외부를 너무 의식하지도, 역과 광장 사이에 위치한 RTO는 3면에 문이 있으며 너무 닫고 있지도 않은 문으로 들어와 문으로 나가는 큰 동선과 내부에서의 분할된 자연스러운 공간마다 주어진 용도와 그에 맞는 행동과 동선들은 현재성을 잃고 헤맨다.7)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극장무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큰 창들과 외부소리의 유입 등이 건물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풍경으로 오버랩 되어 오랜 시간의 무게와 건축당시의 용도가 사라진 공간에서 새로운 무대로 기능하게 된다.
흔적들의 운동성. 과거로부터 쌓여온 것들이 제거되어서 나타난 흔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미완의 형상에서 어떤 조짐, 내재된 가능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그 흔적 위로 새로운 벽이 자라날 것 같다는 상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전과 형태가 전혀 다르더라도 말이다. 이 공간의 피부와도 같은 표면 안팎으로 수없이 쌓이고 지워졌을 시간들도 운동성을 갖는다. 무언가 새로 태어날 듯한 기세로 빈자리를 남겨두고 있는 과거시제의 지형들,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 글을 쓴 리뷰어는 공연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들을 본인의 언어로 잘 읽어준 것 같다. 동시에 한편으로 개별적인 장면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해석이 아주 주관적이더라도 관객으로서 기억에 남는 순간, 혹은 어떤 이미지들을 봤거나 느꼈거나 혹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 <스페이스-쉽>은 장면을 나눠 구성적으로 보기보다는 신체와 생각의 긴장을 이완시켰을 때 감상이 가능했던 작품이었다. 작품에서 공간이 거대한 신체 같기도 하고 신체가 물리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정된 블록마다 5명씩 모여 공연을 관람하면서 퍼포머들이 이동할 때 그들의 행위가 각도상 보이지 않거나 누군가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도 이동하여 볼 수 없는 나의 상황으로부터였다. 그룹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은 건물의 기둥처럼 상황의 유연성 없이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고 다른 사람들의 시야확보를 위해 피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서 이러한 전환의 순간이 생긴 다음으로는 관객이 이동하면서 공연을 관람할 때 공간은 움직이는 신체가 되었으며 신체는 다양한 층위의 공간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룹으로 배치되어 있던 관객들의 형태는 이 공간을 이루는 물리적인 요소8)로 치환된다. 신체가 공간으로 치환되는 순간 공간은 거대한 신체로 혹은 신체가 거대한 공간으로 변화한다. 어느 순간 관객은 퍼포머의 이동에 따라 다양한 보이드(void)를 형성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관계는 퍼포머들이 신체를 감싸고 그 사이를 빠져나오는 신체 움직임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며 공간의 형태와 신체의 중첩은 신체와 공간의 유기적인 -ship으로 작용하는 함축적인 스코어를 보여준다. 움직임이 시작되면 팝콘 기계처럼 쉴 새 없이 몸 안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그 와중에 공간을 인지한 채 하나씩 자신만의 언어를 밖으로 꺼낸다. 언어가 길어진다 싶으면 이따금 멈춰서 몸 안의 소리를 다시 듣기도 하는데, 그 잠깐의 시간이 몸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공간에서 가장 불안정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주세요.’
작품의 후반부에 관객은 다시 안내자들의 안내에 따라 자신의 티켓에 적힌 지시문을 보고 그에 맞는 탐험을 시작하게 된다. 필자의 경우는 여자 퍼포머가 창문의 커튼을 오가며 일렬의 창문을 이동하던 곳으로 갔다. 극장9)과 다른 요소이기에 이를 사용하는 것이 불안해 보였던 걸까, 커튼 속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타이밍이 아슬아슬해 보였을까, 창문 앞으로 걸어가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그곳을 바라보니 어느새 나는 퍼포머의 움직임을 입은 또 한 명의 퍼포머로 자리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퍼포먼스의 마무리는 관객이 스스로 공간을 찾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사유하도록 했는데, 퍼포먼스가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한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일정한 방향성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일 없이, 술렁거리는 내부를 가진 큰 덩어리 같은 공간. 오랜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드러난 벽과 바닥이 마치 지층의 일부 같다. 그러면서 이 공간의 운동성은 그 지층 표면의 작고 국지적인 소용돌이들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미묘하고 다양한 형태를 지닌 표면의 디테일들을 중심으로 끝이 분명치 않은 가느다란 화살표들이 사방으로 산재되어있다. 벽과 바닥의 좁은 구멍과 균열들로부터 뭔가가 흘러온다면, 갑자기 큰 공간을 만나 유속이 느려지는 물처럼 느긋하게 머물러 있을 것 같다.
바깥에는 열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보인다. 이제 공연장 담당 직원 분이 문단속을 하신다. 문화재인 건물이라 지켜야 할 규제가 엄청 많다. 좀 더 나오면 요란한 찬송가 소리도 들린다. 바깥바람이 춥다. 아 맞다 난방이 되는지 물어본다는 것을. 서울역 RTO에서 나는 어떤 신체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떤 풍경일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물을 비롯한 지형10)은 변화하며 그 켜들은 시간의 서사성을 띄어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야기와 역사를 갖는다. 관객과 퍼포머 또한 공간과 신체의 일체를 감각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현재 자신이 서 있는 공간과 자기 자신을 역사화한 시간에 투입시켜 하나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공간과 신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스페이스-쉽>은 공간의 접미사로서의 -ship과 공간과 일체된 신체로서 자신에게 적층된 시간을 탐험한 선박으로서의 ship으로 또 다른 공간에서의 탐험을 유도한다. <스페이스-쉽>은 신체의 감각을 열어 공간과 교감하는 것으로부터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이번에 작품을 만들면서 계속해서 떠올랐던 한 장면이 있었다. 내가 춤에 대해 막 알아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는데, 사실 즉흥 춤 수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워크샵 진행자가 춤을 추는 도중의 멈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 움직일지 모를 때에는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감각을 열어놓고 흐름에 귀를 기울이면, 몸을 맡기면. 어떻게 움직이고 싶은지가 내 안에서부터 생겨날 것이다.
멈춰 있지만 멈춰있지 않은 상태.
깨어있기 때문에 춤을 추고 있는 것인 몸.
그런 순간에 있을 때 내 몸 속에서 일어난 느낌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보고 있는 사람인 동시에 움직이는 사람이기도 할 때.
몸이 되기 위해서 나는 눈꼬리가 양 옆으로 길어져야 한다.
신경과 핏줄이 손과 발로 몰려가며 점점 커진다.
그 신경이 피부를 뚫고 빈 곳으로 나아가 열려있다.
그래서 닿는 곳이 어디이든, 명확한 자국을 남긴다.
몸통은 더 날렵하고 강해져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다.
에너지가 가득 차면 그제야 물이 터져 흐르듯 나아간다.
막지 않는다. 땅에 닿는 발이 있다.
1) 줌인: 관객지시문. 어떤 형태이든, 커다란 구멍을 찾아 그 앞에 마주 서 주세요.
구석으로 갔다. 좀 심리적인 영향도 있었던 거 같고, 어두웠고, 뭔가 길이 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근데 결국 구멍을 찾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왔던 무용수가 기억에 남는다. 내 얼굴 20㎝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는데, 나를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은, 그런 눈이었다.
2) 끌어당겨: 관객지시문. 눈앞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와줬으면 하는 곳으로 이동해주세요.
3) 인지된다: 관객지시문. 창문 아래에 있는 흰색 공을 발견해주세요.
공을 찾지 못해서 벽을 따라 공간을 두 바퀴쯤 돈 것 같다. 그러다가 커튼 아래에 저 아이보리색인건가 싶더라. 작품에서 아쉬웠던 게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면서 공간에 흐름이 생기는데, 그것을 퍼포머들은 느꼈을 텐데 관객들은 공간을 찾는데 집중하느라 그걸 느끼거나 보지 못한 게 아닌가 했던 점이다.
4) 퍼포머들의 동선: 관객지시문. 움직이는 사람과 정지한 사람 사이에 자리 잡아 주세요.
지시문대로 움직이는 사람과 멈춰 있는 사람 사이로 가려다보니. 계속 이동하게 되었다. 혼자 무대 중앙에서 많이 돌아 다녀서 좀 민망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재밌었다. 처음에는 지시문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다니다보니 지시문과 상관없이 이동하면서 구경했다. 움직이는 사람 때문에 내가 계속 이동하게 되는데, 한번은 여러 무용수가 나를 따라 다니며 행동도 따라했다. 순간, 아바타같은 세상이 있는 기분이라 굉장히 재밌었다. 나로 인해 내 주위가 움직여지고 변화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5) 관찰의 힘: 관객지시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 이동해주세요.
마침 검은 코트를 입고 있어서 빛이 없는 곳으로 가면 덜 보이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숨으려다보니 공간의 구석보다는 시선의 구석을 찾게 되었다. 시선의 사각지대라고나 할까? 그렇게 숨어 있다가 곁에 오는 사람을 느끼면 스르륵 밀어내고 이동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지시문을 받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었고, 지시문 때문에 움직이게 되는 흐름도 느껴졌다. 사람들이 공간을 탐색하며 움직이니까 다른 공간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숨어있다 보니 내적으로 계속 '움직이고 싶다' '춤추고 싶다' '소리 내고 싶다' 등등의 충동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연 후 공간을 마음껏 느끼라는 지시에 구석구석 끝까지 체감했다. 특히 곳곳의 균열과 페인트가 갈라져 겹겹이 된 벽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풋라이트를 받은 벽은 살아있는 것 같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 부분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26일 관람)
인적이 드문 곳이 없어서. 너무 통짜 공간인데 어쩌라는 거지...하면서 찾다가 장비 박스(공연 물품 쌓아둔 곳)뒤쪽으로 숨어버렸다. 출입구 맞은편에 있었는데 아무도 신경을 안 쓰더라. (25일 관람)
6) 흔적: 관객지시문. 벽에서 전혀 다른 색이 함께 있는 경계를 눈으로 따라가 주세요.
무용수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내가 제일 숨이 차는 부분이다. 이 때 공연장의 출입구 쪽으로 몸을 향하고 뛰는데, 출입구 옆에는 창문이 있고, 그 사이에는 칸막이가 있던 흔적 같은 경계선이 바닥으로까지 이어져있다. 드디어 몸을 굴려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면, 이건 혼자만의 스토리긴 한데, 순간적으로 정말 낯선 땅에 표류한 듯한 느낌이 든다. 바닥의 균열들을 낯설게 살피면서 만지게 된다. 그 위로 처음 보는 관객들의 몸이 서거나 앉아있는 가운데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 무겁게 춤을 추고 있는 파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음 장면이 시작된다.
7) 헤맨다: 관객지시문. 사각형의 중앙에 자리 잡으세요.
그럴만한 공간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서 요리조리 다녔다. 바닥의 패턴도 찾아보고, 혹시 무슨 비밀장소가 숨겨져 있나 찾아봤는데...나중에는 그냥 불명확한 위치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생각이 되었다. 아니면 내가 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지금 움직이는 퍼포먼스의 과정 중에서 내가 거기 섬으로서 그 공간이 형성되는 뭐 그런 걸까...?;;
8) 물리적인 요소: 관객지시문. 부드러운 것이 손에 닿을만한 거리에 자리 잡으세요.
오퍼레이터석 가까이 서있었는데, 오퍼석에 걸쳐진 작은 쿠션이 보여서, 그 옆으로 가 바닥에 앉았다.
9) 극장: 관객지시문. 공간에서 가장 차가워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주세요.
'출입문 쪽으로 갔다. 가장 추운 곳.' (25일 관람)
'소화전 앞으로 갔다. 생각해보니 불을 꺼준다고 소화기가 차가운 건 아니었는데.' (26일 관람)
10) 지형: 관객지시문. 주변보다 바닥이 움푹 파여 있는 곳을 찾아 이동해주세요.
시멘트가 약간 파인 곳, 기다랗게 난 균열, 다른 곳보다 낮은 곳 이런 데를 몇 군데 찾아다니면서 한쪽 다리를 댔다, 다시 옮겨가고 그렇게 몇 개의 스텝을 밟았다.
* 리뷰의 원문은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자료집에 게재한 글로 <춤:in>의 ‘춤과 건축’ 코너에서 안무가와 함께 새로운 리뷰의 형식으로 재구성 및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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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혜
기획자, 저술가
양은혜는 성균관대에서 무용학, 러시아어문학, 영어영문학을 전공, 대학원에서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하여 안무가, 무용작가, 드라마투르기로 활동하며 무용월간 《춤과사람들》 기자를 역임하였다. 현 서울무용센터 웹진 <춤:in> 편집위원, 무용인들의 담론화 형성과 무용기록 그리고 무용공연의 재생산에 초점을 맞춘 choreographyview를 운영하고 있다. 공간과 무용에 관한 기획 및 글쓰기를 하고 있다.
facebook.com/choreography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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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경
안무가
허윤경은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이후로 꾸준히 다양한 작업에서 퍼포머, 안무가로 활동해오고 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에서 전문사 과정을 밟고 있다. 몸과 움직임을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점으로 만나게 되면서부터 공연예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몸과 몸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무대 언어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함을 발견하는 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