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봄을 여는 두 연출가 구자혜, 이연주
올해 남산예술센터의 연극 무대는
활어처럼 싱싱하다.
시즌 시작인 4월부터 연말까지
포진한 작품들만 살펴봐도
펄떡이는 에너지가 전해진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국가와 개인,
검열, 일상에서의 차별과
집단의 폭력까지
2017년 한국 사회의 화두들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금기도, ‘이래도 되나’ 하는
자체 검열도 없다.
연극이라는 거울을 통해
역사적으로 되풀이된 모순과
억압을 햇빛 아래 드러낸다.
남산의 봄을 여는 두 연출가,
구자혜, 이연주로부터
올해의 무대를 달굴
열기를 미리 엿봤다.
4월 21일부터 30일까지 공연하는 구자혜 연출의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는 예술계 성폭력에 메스를 댄다. 구 연출은 “성폭력이라는 가해가 어떻게 옹호되는지 원리를 탐구하는 공연일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문화계에서는 문학, 만화, 미술, 음악 분야를 망라해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터져나왔다. 스승과 제자, 문인과 작가 지망생, 작가와 팬, 미술관장과 큐레이터 등 주로 수직적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회적 관심은 컸지만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구 연출은 “연극계는 아직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소위 말하는 예술계 성폭력은 과거부터 계속 존재해왔다”며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집중해서 다루려 한다”고 말했다.
“작품에서 예술계를 ‘이 세계’로 상정했어요. ‘이 세계’ 안에 속한, 잘 나가고 위대한 예술인들이 존재해요. 이들이 여기에 진입하고 싶어 하는 습작생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르죠. 이건 위계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집중하고 있어요. 이 공연에 서는 사람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가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해온 예술인들이에요. SNS를 통해 봇물 터지듯 피해 사례가 나오는 상황에서 이 들이 더는 숨어 있을 수가 없잖아요. 가해자 주변인들이 무대에 올라 직접 가해의 역사를 책으로 써내는 콘셉트예요.”
작품에 등장하는 ‘이 세계’는 한 장르에 국한되거나 특정 분야를 연상시키지 않는다. 문단과 연극계, 심지어 직장 내 성폭력도 모두 근본적으로 비슷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구 연출은 그간 성폭력 피해가 공론화되고 해결되지 못한 이유로 ‘예술계의 폐쇄성’을 들었다. 그는 “다른 예술은 모르겠지만, 연극이나 문학은 서로 밀고 끌어주는 가족주의적 태도가 근본 문제”라고 꼬집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연에서 가해자 주변인들이 ‘오케이, 우리가 가해자를 추적해서 그를 처벌할게, 이 판에서 쫓아낼게’라고 정당한 논리처럼 이야기해요. 실제로 추방할 거예요. 그런데 그 이유는 예술계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이들이 가해자의 등급을 나눠요. ‘시도 못 쓰는 ‘새끼’가 그런 가해를 저질렀으니 얘는 100점짜리 가해자다. 이런 시인은 추방하겠다, 우리 세계에 이런 시인 하나 없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거죠. ‘이 판을 견고하게 지키려면 영역을 좁혀야 된다, 나갈 사람은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귀족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고요.”
구 연출은 “어느 스포츠 기사에서,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야구 선수가 성 매매나 원정 도박을 했다면 그의 죗값이 좋은 성적으로 만회될 수 있는가’라고 하더라”며 “저희는 이를 ‘만약 시인이라면 그의 죗값이 그의 시성으로 만회될 수 있는가’라고 바꿔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성폭력을 옹호하는 논리로 가족주의와 함께 남성 중심적 문화를 들었다.
“예술계 내에서 힘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은 성별이 남성에 몰려 있잖아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건 아닌 것 같고, 인류 역사상 계속 작동해온 원리인 것 같아요.”
연극 무대 역시 아무런 반추 없이 성차별을 되풀이한다. 구 연출은 “연극 캐릭터를 보면, 성장은 항상 남성이 하고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돕는 도구나 산파, 순결한 존재이다. 여성이 강간을 당했는데도 성장은 남성 캐릭터가 한다”며 “연극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까지 작품에 포함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팀원들과 수다를 떨던 중 ‘연극에서 여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캐릭터가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얘기가 나왔어요. ‘출산한 여배우는 어디로 사라지나, 무대에서도 남성 중심적 서사가 심각하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죠. 한 여배우가 ‘그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어요. 제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라고 했는데 그 배우가 ‘우리 팀은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먼저 씨앗을 던졌죠.”
구 연출은 연극계 성폭력에 대해 “정말 간당간당하게 공론화가 안 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피해 사례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힘든 이유는 공동 작업이라서 그런 것 같다”며 “연극은 집단 작업이고 판이 좁고 극단 단위로 굴러가기에 더 공론화시키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성폭력은 일부 주류 예술인들을 불편하게 할 주제다. 자신이 몸담은 예술계의 치부를 드러내다 보면 자기 검열에 빠지지 않을까. 그러나 구 연출은 “연극계를 비판하는 일이라 자기 검열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4월 6일부터 16일까지 <2017 이반검열>을 올리는 이연주 연출도 날선 문제 제기를 던진다. 우리 사회 모든 ‘이반’에 대한 차별이 어떻게 제도나 교육을 통해 학습되는지, 국가가 이에 대해 어떻게 개입하는지 파헤친다. 이 연출은 “청소년 성소수자와 세월호 형제자매·생존 학생의 구술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라며 “각각의 미시사를 통해 국가의 검열이라는 거시사를 다룬다”고 소개했다.
‘이반검열’이라는 용어는 본래 2000년대 초반부터 2011년쯤까지 학교에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설문으로 가려내 징계한 사태를 가리킨다. 이 작품에서 ‘이반’은 성소수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가 정한 기준, ‘일반’에 어긋나는 모든 이들을 이반으로 통칭한다. 이 작품은 지난해 <권리장전2016-검열각하>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4명의 배우가 성소수자, 세월호 희생 학생의 형제자매, 세월호 생존 학생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들이 경험한 일상 속 차별, 제도적 폭력과 검열은 박정희 정권의 재건국민운동중앙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삼청교육대,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 최근의 퀴어 페스티벌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이번 공연에서도 큰 틀은 바뀌지 않는다. 이반검열과 역사적 사건 사이의 연결 고리를 더 선명히 보여주는 선에서 수정했다.
“존재 자체가 배제, 부정되는 이들을 무대 위에 온전하게 세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를 놀리거나 동정하거나 연민으로 바라본다면 그 또한 차별과 배제라고 생각해요. 이 과정이 집단화되면 혐오 표현으로 연결되고, 혐오 표현이 누군가의 집단화된 목소리와 권력을 통해서 더 큰 폭력과 증오로 확장된다고 봐요. 이것이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어떤 틀 안에서 재생산되는지를 바라보는 거고요. 저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차별과 폭력의 역사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지금 우리 안에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 질문을 던지고 싶고요.”
그는 “결국 이반검열이 무엇인지, 검열이 우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 차별과 배제, 폭력으로 나아가는지 작동하는 장치를 들여다보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가공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존 인물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구성됐다. 이 연출은 공연을 위해 성소수자들의 차별 경험이 담긴 구술집 <무지개들의 작은 비밀일기>,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과 형제자매의 속내를 담은 육성 기록집인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참고했고 이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이반검열>과 <불온한 당신>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다. 무대에는 이들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긴다. 때문에 그는 작가가 아닌 ‘구성·연출’로만 이름을 올렸다.
“작년에 이반검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자료를 찾았을 때 처음 읽은 자료들이에요. 신문기사와 누군가가 쓴 글, 즉 기억들을 읽어봤어요. 처음에는 자료로서 접한 글들이었는데, 그 말을 대체할 다른 말을 쓰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말들이 소중했기에 그 이야기들로부터 출발하고 싶었어요.”
그는 관객에게 “우리가 어떻게 교육받고 그에 익숙해졌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면 좋겠다”며 “내가 어떤 시선으로 누군가를 재단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작년 공연에서는 ‘가만히 있어라’가 주요 키워드였어요. 전체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요.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은 늘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인권과 민주주의는 늘 나중으로 미뤄야 하는 문제인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 이야기해야 해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작품들은 지원을 배제하겠다는 논리는 ‘가만히 있어라’와 연결된다고 봐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더라도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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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은아
세계일보 문화부 기자. 연극·뮤지컬·국악·클래식 음악·무용 등 공연 전반을 담당하고 있다.
사진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