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황석희

영화 자막 세계를 사로잡은 남자

by 서울문화재단
“번역가가 돼야겠다.”,
막연히 저런 생각을 가졌던
대학 3학년 때 내 머릿속에
있던 번역가는 당연히
소설 번역가였다.
꼭 소설이 아니더라도
어떤 텍스트를 보고,
텍스트를 생산하고, 텍스트로
소비되는 그 무언가를
번역하는 직업. 영화 번역에
흥미가 없던 게 아니라
영화번역가라는 직업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했다.
영화광은 아니더라도 종종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비디오도 빌려다 보고
했을 텐데 저 자막은
누가 만드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고 심지어
으레 곁에 있는 공기처럼
영화 속에서도 자막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
noname01.jpg?type=w966 번역가 황석희 [출처 : 빅이슈]


모두가 나와 같진 않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내 아내는 심지어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활기록부 희망 직업란에 영화번역가를 적어 놓았을 정도니까. 대학 4학년, 문서 번역 아르바이트에 지쳐갈 무렵 아주 우연히 영상 번역가를 찾는다는 광고를 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회사를 찾아갔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가방에 한가득 소스 비디오테이프와 대본 프린트를 넣고 돌아오면서 그제야 깨달았다. 뭐든 자막이 있다면 그걸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예수 옆구리에 난 창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부활을 믿은 도마의 심정과 같다고 우기기엔 솔직히 너무도 저렴하고 둔한 지각력이다.

지금은 번역가라고 하면 영화번역가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런데 영화번역가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현상이다. 실체가 있다는 건 비판하고 평가할 대상이 존재한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심지어 실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절엔 번역에 대한 비판도 거의 없었고, 영화번역가가 쓴 자막은 신의 말씀이나 되는 양 당연히 언어적인 흠결이 없고, 그 정확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에 비하면 심리적으론 부담이 덜했을 것이다. 활을 쏘는 관객들이 있더라도 내 몸이 실체 없는 연기인데 화살이 꽂힐 리가.

지금은 영화번역가의 존재감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번역가들의 사진까지 인터넷에 널려 있으니 실체 여부를 운운하기도 우스운 상황. 베일에 싸여 있던 번역가들의 존재가 드러남에 따라 불스아이도 실체를 갖췄다. 자막에 불만족한 관객들이 쏜 화살은 더 이상 실체가 없는 연기를 뚫고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으며 과녁에 정확히 박힌다. 게다가 지금은 관객들의 영어 실력과 해외 문화 이해도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서 화살 하나하나가 뼈가 시리게 아프다.

물론 모든 지적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관객들이 내 자막에 피드백할 수 있도록 블로그에 메일 주소를 공개해 놨는데 그 주소로 온 피드백 이메일을 표본으로 하자면 정말 타당한 지적은 작품당 20%~30% 정도다. 나머지는 관객이 잘못 해석했거나, 대사를 잘못 들었거나, 배경 지식을 모르고 지적하는 경우. 그리고 여기서 높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것이 ‘직업적 오해’다. 이 오해는 대부분 영화 번역 작업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다. 즉, 거꾸로 생각해 번역 작업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제목 번역에 대해


01.jpg?type=w966 (좌) <等一個人咖啡> 해외 포스터 / (우)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국내 포스터 [출처 : (좌) 구글 검색 / (우) 네이버 영화]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 몇 가지를 짚어보자. 우선 영화 제목 번역은 번역가의 몫이 아니다. 대부분은 영화 수입사1)에서 결정하고 수입사가 배급사, 홍보사와 논의해서 결정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번역가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주 드물뿐더러 의견을 내도 수많은 의견 중 하나일 뿐이라서 꼭 채택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몇 번 의견을 낸 적이 있는데 사용된 적은 딱 한 번이다. 대만 영화 <等一個人咖啡(등일개인가배)>, 영어 제목은 <Cafe. Waiting. Love>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카페 이름이 ‘等一個人咖啡(등일개인가배) : Cafe. Waiting. Love’인데 ‘等一個人咖啡’를 한국어로 풀이하자면 ‘한 사람을 기다리는 커피’가 된다. 나는 이 카페 이름을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라고 옮겼고 이게 그대로 이 영화의 제목이 됐다. 작명에 소질이 없는 건지 이 예를 제외하곤 내 의견이 반영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수입사에서 제목을 정할 땐 셋 중 하나다.

02.jpg?type=w966 (좌) < Two days, one night> 해외 포스터 / (우) <내일을 위한 시간> 국내 포스터 [출처 : (좌) 구글 검색 / (우) 네이버 영화]


첫째, 한국어로 번역. 이 예는 원제의 뜻을 거의 정직하게 번역하는 경우와 원제의 뜻과 무관하게 짓는 경우로 나뉜다. <The Light Between Oceans(2016)>는 영화의 내용과 이미지를 반영해 <파도가 지나간 자리>라는 제목을 썼고, <12 Years a Slave(2013)>은 영문 그대로 <노예 12년>이란 제목을 썼다. 최근 한국어 제목을 잘 지었다고 평가되는 작품 중에서는 <Two Days One Night(2014)>가 있다. 한국어 제목은 <내일을 위한 시간>. 원제와는 뜻이 전혀 다르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직업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 제목과 잘 맞아떨어졌다. 내 일(job)과 내일(tomorrow)을 언어유희로 사용한 이 제목은 제목만으로도 그 위트가 상당하다.

둘째는 외국어 제목 음역이다. <Manchester by the Sea(2016)>은 음역해서 그대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현재 외화 시장에서 가장 흔히 쓰는 방식이다. 간혹 그대로 번역해도 좋은 제목이 될 것을 굳이 전치사, 관사까지 다 써서 음역하느냐는 지적이 일곤 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대부분의 수입사가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까닭이 있다. 게을러서 제목을 음역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비싸게 사 온 작품인데 성적에 1%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깟 제목 100개를 못 지을까. 문제는 한국어로 바꿨을 경우 원제를 쓰는 것보다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야 하는 수입사 입장에선 한국어로 바꾸는 것 자체도 모험일 때가 있다. 그리고 어설프게 바꿨다간 관객들에게 역풍이 분다. 그러니 안전하게 음역을 택할 수밖에.

03.jpg?type=w966 (좌) 해외 포스터 / (우) <로스트 인 더스트> 국내 포스터> [출처 : (좌) 구글 이미지 검색 / (우) 네이버 영화]


셋째는 원제와 다른 외국어 제목을 짓는 경우다. 최근 작품을 예로 들자면 <Hell or High Water(2016)>다. 한국 개봉 제목은 <로스트 인 더스트>. 원제의 발음이 어렵거나 생소한 단어, 표현일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제목은 작품에 삽입된 OST 가사에서 따왔다. 텍사스를 배경으로 하는 서걱서걱한 작품이기 때문에 잘 어울린다는 평도 많았다. 물론 이런 방식에 반감을 갖는 관객들도 많다. 세 방식 중 반감을 가장 많이 사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일단 연출자의 의도를 거스르게 될 확률이 크고, 이렇게 바꿀 거면 차라리 한국어로 바꾸지 왜 굳이 영어를 쓰느냐는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말고도 세부적으론 여러 가지 예가 있다. 확정된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애매할 경우 감독이 처음에 정했던 제목을 쓰기도 한다. 곧 개봉할 <Maudie(2017)>란 작품은 한국에서 <내 사랑>이란 제목으로 개봉한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My Love>였다. 그러니 전혀 엉뚱한 제목은 아닌 셈이다.



영화 자막이 탄생하는 과정


번역가가 영상과 대본을 보고 번역해서 1차 번역본을 수입사에 넘기면 수입사에서 감수하고 의견을 첨부해서 다시 번역가에게 보낸다. 이 과정에서 오타와 오역이 한 번 걸러진다. 피드백을 받은 번역가는 감수자와 논의하면서 수입사의 피드백을 반영하고 전체를 재감수하며 오역과 오타를 다시 한 번 거른다. 이 과정은 수입사마다 달라서 피드백 과정을 생략하는 곳도 있고 피드백 교환을 네다섯 번 하는 곳도 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수입사에서 자막랩(자막을 화면에 올리는 작업을 하는 영상 업체)에 대본과 영상을 보내고 드디어 자막이 올라간 상영본이 탄생한다. 수입사에선 이 상영본을 홍보사, 배급사2) 등 개봉 스태프들에게 배포하거나 상영관에서 내부 시사를 하며 이때부터 개봉 전략을 구체적으로 세운다.

그 사이 번역가는 자막이 올라간 상영본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오역과 오타를 잡는다. 이 과정에선 실제로 자막이 올라간 영상을 보기 때문에 고치고 싶은 대사가 많이 보인다. 이렇게 수정한 대본을 다시 수입사에 발송하고 수입사는 다시 피드백을 주거나 그 대본을 감수해서 자막랩에 넘긴다. 자막랩은 기존에 올린 자막에서 이번에 수정된 부분만을 새로 수정하여 최종 상영본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최종 상영본으로 일반 시사회를 하는데 이때 오역이나 오타가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최종 상영본을 만드는 비용은 100만원에서 200만원이 들기 때문에 오타가 보인다고 무조건 새로 상영본을 찍을 수도 없다. 대부분 정말 티가 많이 나고 심각한 경우에 다시 찍는다.

번역가는 이런 상황을 만들면 염치가 없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래서 내가 여전히 쥐구멍에서 못 나오고 있다. 최근에 오타와 오역을 몇 번 냈기 때문이다. 한 번 관객에게 오타 제보를 받아서 다음 작품은 도끼눈을 하고 몇 번을 감수했건만 또 오타가 나왔다. 나만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수입사 직원들도 확인하기 때문에 최소 열 개의 눈이 다섯 번 정도는 확인할 텐데 보이지 않는 오역과 오타는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걸 업계 용어로 “마가 뜬다”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관객들 눈에는 한순간에 포착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비결을 빨리 습득해야 나도 쥐구멍에서 나올 텐데. 이렇게 나오는 실수는 미리 자수하고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한 작품에 오타와 오역이 네다섯 개씩 나온다면 정말 문제 있는 번역가겠지만 한두 개는 휴먼에러라고 봐주시면 제가 쥐구멍에서 나오는 데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원작과 번역이 다르다


소설이나 만화 등이 영화화됐는데 원작에서 유명한 대사가 영화 자막에선 다르게 나온다면 둘 중 하나다. 번역가가 원작을 공부하지 않았거나, 너무 유명한 대사라 그대로 쓸 수 없는 경우. 생산자의 독특한 표현이나 발상이 반영된 대사를 자막에 그대로 쓰면 저작권 침해와 표절 이슈로 곤란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다만 ‘어둠의 기사 배트맨’처럼 누가 봐도 평이한 문장이라거나 영문을 그대로 옮겨도 나오는 표현이라면 이런 이슈를 무시할 수 있다. 그럼 꼭 써야 하는 독특한 표현은 어떡할까? 보통 번역가에게 허락된 시간은 5~10일이다. 이 안에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 배경 조사하고 번역까지 한다는 건 시간과 추가 비용의 문제를 생각할 때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무리 유명한 대사라도 이럴 땐 똑같이 쓰기가 어렵다. 나만의 대사를 만들거나, 최대한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다르게 쓰거나.

image_5388193821496223311400.jpg?type=w966 영화 <데드풀>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영상을 못 보고 번역해?


영화번역가들이 오래전에 한 인터뷰를 보고 아직도 이런 오해를 하는 관객들이 있다. 예전엔 영상을 주지 않아서 수입사에서 영화를 보며 카세트테이프로 음성만 녹음하고 집에서 그 음성을 들으며 대본을 보고 작업했다. 지금 이런 방식을 쓰는 곳은 내가 알기로 한 곳뿐이다. 그 영화사와 작업했던 작품이 있어서 그 덕에 나도 기사에서나 보던 예전 방식의 작업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영화사도 모든 작품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에 한해 그렇게 작업한다.

지금은 영상을 못 보는 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대본과 영상을 다 받는다. 영상을 파일로 받을 때도 있고 스트리밍3) 링크로 받을 때도 있다. 그러니 영상을 못 봐서 오역할 수도 있다는 말은 지금과는 맞지 않다. 단! 정말 영상을 제대로 못 봐서 오역하게 되는 작품도 드물지만 있긴 있다. 영상을 제대로 못 보는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너무 비싼 작품이라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정상적인 영상을 주지 않을 때다. 번역가가 받는 영상은 질이 좋은 경우가 거의 없어서 인물의 얼굴이 분간 안 될 정도로 해상도가 낮은 영상을 받을 때도 있고, 심지어 화면 전체가 블러 처리되고 작은 원이 인물의 얼굴을 쫓아다니며 얼굴만 보여주는 영상도 있다. 배경은 보여줄 수 없으니 누가 말하는지만, 그것도 얼굴만 보라는 거다. 그리고 그 영상의 대부분은 흑백이다. 그래서 색깔과 관련된 대사가 나오면 아주 곤란하다. 일단 짐작해서 작업하는 수밖에 없다. 또, CG 처리가 덜 된 영상을 받을 때도 많다. 그러면 대체 이 인물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지문에는 폭포라는데 그린스크린4) 앞에서 비틀비틀하고 있으니 어느 바위를 디디고 있는지 발이 빠졌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다.

뭐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냐고 놀랄 수도 있겠지만 자막을 올려 시사할 때는 제대로 된 영상을 보기 때문에 그 후에 틀린 것들을 수정하면 된다. 문제는 자막을 수정할 시간이 얼마나 있느냐다. 한 번 정한 개봉 일정은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절대로 변경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차이에 엄청난 돈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피치 못할 사정에 번역 스케쥴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니 번역가가 맞추는 수밖에. 자막을 올려 시사하면서 오류를 발견했지만 일정상 수정할 시간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있더라도 너무 열악한 영상으로 작업해서 고칠 게 많은데 번역가에게 허락된 시간은 하루뿐이라면 오역을 다 잡기가 버겁다.

개봉작을 번역하기 전엔 케이블 TV 외화만 6년 정도 번역했는데 그땐 영화 한 편에 이틀, 드라마 한 편은 하루에 번역해야 생계유지가 가능했다. 그렇게 6년을 번역하다 보니 번역 속도는 어디 가서 방귀 좀 뀐다는 수준은 된다. 하지만 아무리 번역 속도가 빨라도 자막에 실수가 많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틀에 한 편 작업이 가능할지라도 일주일을 꼬박 번역에 쏟는 것이다. 시간 여유가 더 있으니 배경 조사도 더 하고. 영화사의 급한 요청으로 개봉작 번역을 밤새워가며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완료했던 적도 있는데 결국은 짐작한 대로 오역이 몇 개나 나왔다. 이렇게 영상의 질이 낮은데 시간까지 촉박하다면 오역이 나올 수밖에 없다.



왜 개봉작 번역은 하는 사람만 할까?


image_4678837201496223373207.jpg?type=w966 <아메리칸 허슬>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케이블 TV 외화 번역을 할 때 나도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지천에 널린 게 영어 잘하는 사람이고 그중에 잘하는 사람을 뽑으면 될 텐데 왜 늘 하던 사람이 할까? 한국에서 개봉작 번역으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개봉작 번역가가 될 확률은 희박하다고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희박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사들이 번역가를 발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발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발굴할 이유가 없다. 위에도 말했지만 작품 당 번역가에게 허락된 시간은 적게는 3일, 많아 봐야 10일 정도다. 마케팅과 심의, 배급 일정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영화사가 임의로 저 시간을 무한정 늘릴 순 없다. 그러니 보통 7일 내로 번역을 마쳐야 하는 영화사 입장에선 새로운 번역가를 쓸 여유가 없다. 평소에 발굴하지 뭐 했냐고? 평소에 번역가 발굴할 여유가 있는 영화사는 한국에 단 한 곳도 없다. 작품 검토, 해외 마켓 준비, 지금 개봉 중인 작품 홍보 및 관리, 다음 개봉작 준비로 정신이 없는데 그 와중에 새로운 번역가를 발굴한다는 건 현실과 거리가 멀다.

번역에 자신 있다는 사람이 강력히 영화사에 어필해도 별 도움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개봉작 번역가가 아닌 사람 중에 자막을 만들어 봤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케이블 TV(IPTV, DVD, 기내방송, 영화제) 외화를 번역하는 프로 번역가이거나 인터넷 자막을 만들어 본 아마추어 번역가.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이들 중에서 누굴 곧장 실전에 투입할 순 없다. 물리적으론 개봉작 번역과 케이블 TV 번역의 대본 포맷 자체가 다르고, 그밖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의 풀이 달라서 번역하는 감각도 많이 다르다. 지금이야 개봉작만 번역하지만, 개봉작과 케이블 TV 외화를 같이 번역하던 과도기에는 그게 가장 힘들었다. 머릿속에 스위치가 있어서 개봉작을 번역할 땐 개봉작 회로를 켜고, 케이블 TV 외화를 번역할 땐 케이블 TV 회로로 전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만큼 번역의 감각과 자막의 물리적인 기준들이 달라서 혼란스럽다. 그렇다 보니 케이블 TV 번역가들도 덜컥 일주일만에 개봉작을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니 영화사가 평소에 나름의 인력을 동원해 번역가를 발굴해서 개봉작을 번역할 수 있게끔 포맷과 기준과 감각을 가르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폭스, 워너, 소니, 디즈니, UPI 등의 직배사5)들은 번역가가 써야 하는 소프트웨어가 제각각이고(물론 같은 곳도 있다) 그 소프트웨어도 그냥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외 업체에 계약서를 보내고, 사용자 계정을 생성하고, 그 업체의 외국인 직원과 통화하며 소프트웨어 튜토리얼6)을 마쳐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절차가 있는데 일주일 만에 작업해야 하는 영화를 처음 하는 번역가에게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개봉작 번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까? 희박하지만 몇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케이블 TV든, IPTV든 이름을 내밀 정도의 오랜 경력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그 경력으로 죽어라 몇 년이고 영화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 자막신이 임하시는 정말 운수 좋은 날이면 영화사의 직원 중 누군가는 아주 희박한 확률로 그 이력서를 봐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운 좋게 번역 일정에 여유 있는 작품이 대기 중이고, 아주 운 좋게 마침 주로 거래하던 번역가가 바쁠지도 모른다. 이게 나의 경우다. 그날은 아마 로또를 샀어도 맞았을 것 같다.

04.jpg?type=w966 (좌)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 (우) 제21회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다른 하나는 각종 영화제에서 번역가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부천, 전주, 제천, 부산 등 지역별 영화제가 있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작품들은 해외에서 이슈가 된 작품들도 많고 대체적으로 수준이 높다. 영화 수입사는 영화제에서 상영 요청이 오면 영화를 보내고 영화제 측 번역팀이 영화를 번역한다. 전에는 영화제 내부에 번역팀이 있었는데 요새는 외주를 주는 일도 많다. 영화제에서 번역해주기 때문에 수입사는 이렇게 번역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번역 질에 더 욕심이 있는 수입사는 영화제 자막을 쓰기보단 돈을 들여서라도 영화제 출품 전에 개봉작 번역가에게 의뢰해서 번역을 완료한다. 이런 예외를 빼고는 영화제에서 번역하기 때문에 영화제 번역가들도 좋은 작품들을 번역할 기회가 더러 생긴다. 그런 작품들은 각 영화사 관계자들도 다 볼뿐더러 번역에 통째로 뜯어고칠 정도로 결함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자막 그대로 개봉하기 때문에 일반 관객들도 다 그 자막으로 관람한다. 이때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영화사에서 영화제에 연락을 취해 번역가를 수배하고 일을 맡길 수도 있다. 그나마 영화제 번역 대본은 개봉작 번역 대본과 포맷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데뷔하는 것도 확률이 아주 희박하고 전례도 손에 꼽는다.

데뷔를 해서도 문제다. 데뷔하고 몇 작품 못 한 채 번역계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데뷔 이래 작업한 작품들이 다 빛을 보지 못하고 초라한 성적을 거두면 다음 기회를 받기도 어렵다. 그러니 신인 시절에 어떤 작품을 만나느냐도 중요하고, 그 작품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느냐도 중요하다. 이건 순전히 운이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 전혀 무관하다. 나는 운 좋게 <웜바디스>가 관객 100만을 넘었고, 다음 작품인 <나우 유 씨 미>는 270만을 넘었다. 그 후 소소한 작품들을 작업하는 사이에 자막을 재밌게 봤다고 <레드: 더 레전드>가 들어왔고 그 작품은 300만을 넘었다. 그러니 나는 작품 운이 좋아도 비정상일 정도로 좋았다.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밖에. 그 정도 운이 없었으면 이곳에서 버티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능력이 출중해서 영화번역가로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수많은 운과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건전하고 좋은 방식은 케이블 TV나 IPTV 등에서 경력을 충분히 쌓은 번역가가 영화제 번역을 꾸준히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 영화제가 영화사에 번역가를 추천하는 것이다. 좋은 번역가를 발굴하고 관객들에게 좋은 자막을 선물하는 역할은 영화제가 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게 영화제의 책임이나 의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이렇게 영화계에 기여하는 것도 큰 의미가 되지 않을까?

로또에 비견될 정도로 희박한 확률을 뚫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단계를 밟은 좋은 번역가들이 영화를 번역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지금보다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고 내가 간신히 서 있는 이 좁은 자리도 위태로울 게 뻔하다. 그런 환경이 조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현실이 된다면 두려운 마음으로 감히 환영할 것이다. 나태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박수 받으며 은퇴하는 영화번역가가 되고 싶다. 한 80살까지 해먹다가.



KakaoTalk_20170531_185806964.png?type=w966

글·사진 황석희
영화 데드풀, 웜바디스, 아메리칸 허슬 등 감칠맛 나는 자막 번역으로 인기 있는 영화번역가

drugsub.net


1) 해외 필름마켓에서 영화를 수입해 오는 회사
2) 수입해 온 영화를 극장과 연계해 개봉하고 개봉 상영관들을 관리하는 회사
3) 인터넷에서 음성이나 영상, 애니메이션 등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기법
4) 화면을 합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녹색의 스크린.
5) 배급사와 같은 일을 하지만 해외 본사가 있고 그 회사의 영화만을 취급하는 회사
6) 사용 지침서, 사용 지침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