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를 모르면 예술 하면 안 되나요?
‘e나라도움’은 국고보조금이
지원되는 모든 보조사업을
관리하기 위해
기획재정부가 만든
국고보조금 관리
통합시스템이다.
이중·부정 수급을 근절해
‘국고보조금=눈먼 돈’이란
오명을 벗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다.
이렇게 좋은 취지로 개발된
시스템이 어쩌다 예술가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을까.
“예술인들이 아니라, IT 기술자들에게 보조금을 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작가의 목소리가 한껏 격앙돼 있다. 그는 ‘e나라도움’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기도 내 한 지역 문화재단에서 진행하려던 문화예술사업을 막 포기하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e나라도움’이 IT에 능숙하지 않으면 쉽게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건, 이를 개발한 기획재정부도, 사용법을 교육하는 강사들도, 보조금을 처리해야 할 사용자들도 모두 인정한 사실이다. 보조금 사업을 포기했던 위의 작가는 사업자로 인정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은행에서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회원가입을 마쳤고 ‘e나라도움’ 상담사들과 수차례 통화를 하고 나서야 겨우 사업자 등록과 보조금 사업자 권한을 갖는 기관 권한 관리자 등록도 끝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사업 기본 정보, 수행 기관 정보, 세부 추진 계획 등 총 8단계에 이르는 사업 등록 과정을 비롯해 단계마다 인증을 하고 상위기관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어렵게 한 고개 넘으면 다시 높은 골짜기가 나오는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던 작가는 “IT 기술능력이 없으면 예술사업을 포기하라는 정부의 메시지”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보조금을 지급받아 활동하는 예술인들은 하루 종일 ‘e나라도움’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다. 생계를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예술활동을 하는 이들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업을 진행하는 내내 ‘e나라도움’에 활동의 전 과정을 보고하고 필요한 금액을 결제할 때마다 승인을 받아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하기 어렵다. 그렇게 감시하지 않아도 이미 각종 서류를 통해 사업의 진정성을 검증받아왔다.
사용자의 특수성을 배려하지 않는 행정시스템이 초래한 결과는 생각보다 끔찍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예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던 이들에게 엉뚱하게 ‘IT 기술능력 없음’을 낙인찍고 좌절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시스템이 돕고자 했던 이들의 예술활동을 방해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시범운영 한 번 없이 완성도 안 된 시스템을 무턱대고 시행한 기획재정부뿐 아니라 문화예술계를 대변해야 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시스템을 기획하고 개발한 기획재정부는 문화예술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단적인 예로 이들은 작가를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일정한 수입원이 없는 상당수 예술인들이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실제로 ‘보조금 전용 카드’임에도 일반 기준을 적용받아 카드를 발급받지 못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한 극단 대표는 카드 발급이 가능한 지인을 대표자로 바꿔 카드사에 보조금 카드 발급을 요청했지만 카드사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이 극단 대표는 “인간적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라며 한숨 쉬었다.
사실, ‘e나라도움’이 본격 시행된 올 1월 이전,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11월부터 각 중앙부처와 광역·기초자치단체 등에 ‘e나라도움’을 공지하고 담당자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었다고 해명했다. 또한 가장 저항이 거셀 것으로 예상한 농림축산식품부를 비롯해 타 부처의 경우 상황반을 가동하면서 예견되는 문제를 미리 기획재정부에 건의해 대안을 만들어놓았고 현재 큰 무리 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유독 문화예술계에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지난해 11월이라면, 문화체육관광부가 국정농단 사태의 주 무대로 떠올라 내부가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그래서일까. 개통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문화체육관광부는 ‘e나라도움’을 공지했다. 현장이 혼란 속에 어지러운데도, 문화체육관광부는 “기획재정부가 만들었으니 그쪽에 문의하라”는 성의 없는 답변을 내뱉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적극적으로 예술인들이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을 예측하고 미리 대안을 준비했더라면 예술인들이 돈 몇 푼에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 현실을 직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보조금의 재원을 마련해준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국민의 고유한 권리를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e나라도움’에 사업을 등록하지 못해 상반기에 시작됐어야 할 지역의 문화사업들이 연기됐고 사업을 포기하는 사례도 속속 발생하고 있다. ‘e나라도움’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면 내년 사업부터는 보조금 사업공모에 지원하지 않겠다는 예술인들도 나오고 있다.
취재 이후 해명을 위해 찾아온 기획재정부 담당자에게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추천했다. “자존심을 잃었으니 이미 다 잃은 거요”라고 읊조리는 다니엘의 표정을 본다면 ‘e나라도움’이 가야 할 길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부디 이 처방이 맞길 바라며 전면 개통 예정인 7월, 달라진 모습으로 만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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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공지영
경인일보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