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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Jul 17. 2015

‘완전한 여성’ 혹은 ‘완전한 남성’이라는 허상

책 「여성의 남성성」과 「젠더 무법자」

지금 대한민국은 ‘김치녀’와 ‘김치남’의 세상이다. 김치녀는 그 옛날의 된장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고, 김치남은 한층 날카로워진 여성의 목소리가 피곤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선 남성 진영에도 여성 진영에도 안식은 없다. 유일한 안식은 우리 모두가 실은 완전한 남성도, 완전한 여성도 아니라는 가능성에 있다.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사진 제공=이매진)


남성성은 남성만의 것일까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1995년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 <신주쿠 보이즈>는 일본 ‘오나베’를 소재로 한 영화다. 오나베란 남장 여자란 뜻으로 영화에선 여성 성노동자 중 행동이나 복장이 남성에 가까운 이들을 지칭한다. 오나베의 주 고객층은 남자가 아닌 여자다. 이 여자들은 남자가 아닌 여자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자기 파트너에게서 소위 여성성이 폴폴 풍기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오나베와 그 고객들을 보고 있자면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여성성 없는 여자를 원하는 이들의 욕구는 어떤 것일까. 여성성을 싫어하면서 굳이 여자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이유는 뭘까. 남자의 경우 남성성 없는 남자와 관계 맺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원하는 건 남성의 몸인가, 여성적 성향인가.


이 질문들은 ‘여성성과 여성’, ‘남성성과 남성’이 각각 동전의 양면처럼 딱 달라붙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우리 사이에 폭넓게 퍼져 있음을 일깨운다. 주디스 핼버스탬의 <여성의 남성성>에 따르면 ‘여성성과 여성’ 혹은 ‘남성성과 남성’의 관계는 그다지 긴밀하지 않다. 주디스 버틀러와 함께 여성, 젠더, 퀴어 연구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핼버스탬은 다분히 음모론적인 태도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가 여성의 남성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이유는 남성의 남성성을 “진짜”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성이 만든 남성성만이 진짜이고 온전한 것이며 여성이 만든 남성성은 모방이나 자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대해 저자는 “(남성성은) 남자와 여자 둘 다의 육체를 거쳐, 두 육체를 가로질러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말한다.


핼버스탬이 역사적 사료에서 찾아낸 여성의 남성성 사례는 충격적이면서 흥미진진하다. 여기서 남성성은 남자다운 성격이 아닌 주로 침대 위에서의 역할, 즉 여성에게 성적 쾌감을 선사하고자 하는 행동, 성향, 방법, 의지의 총체를 뜻한다. 1811년 영국의 한 여학교에서 여학생 한 명이 두 여교사의 ‘추잡한 성적 행위’를 고발했다. 학생에 따르면 두 교사는 한밤중에 서로의 침대를 찾아갔으며 “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이나 거친 숨소리, 그밖에 수상쩍은 소리와 묘한 대화”를 사방에 흘렸다. 소리는 “물 묻은 병의 목에 손가락을 집어 넣은 것 같은 빠는 소리”였으며 대화는 “잘못 집어 넣었어” 같은 것들이었다.


당시 판사들 중 이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남성의 성기 없는 성교를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은 학생이 ‘인도계’였다는 데 주목, 인도의 특수한(혹은 문란한) 성적 문화 때문에 학생이 교사들을 오해한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저자는 사회의 주류 계층인 판사들이 ‘삽입기관 없이 오로지 여성의 남성성에 의해 이뤄지는 성관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남성성 발전의 역사에 여성이 참여한 부분을 쏙 빼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배제’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으며,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의 일치를 의무화하는 목소리에 힘을 보태주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이미지 제공=바다출판사)


모든 이에게는 젠더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핼버스탬이 “남성성은 남자만의 것이 아니며 남성적 여자들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외친다면 케이트 본스타인은 아예 젠더 분류 자체를 거부한다. 먼저 본스타인의 성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백인 남성으로 태어난 그는 성기절제술을 받아 여자의 몸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라 부르면 되겠지만 그의 성적 취향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그럼 트랜스섹슈얼 레즈비언인가? 그런데 본스타인의 애인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젠더 전환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럼 이 사람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여자를 좋아하는가, 남자를 좋아하는가? 어쩐지 점점 짜증이 실리는 독자의 질문에 본스타인의 대답은 느긋하다.


“많은 사람이 ‘성별 정체성’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남성임’ ‘여성임’을 느낄(feel) 수 있다고 말이다. (…) 나는 ‘여자’가 뭘 느끼는지 전혀 모른다. 소녀나 여자라고 느낀 적이 없으며, 내가 소년이나 남자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젠더 전환에 확신을 준 것은 느낌의 존재라기보다 부재였다.”


단지 ‘느낌의 부재’라는 이유만으로 인종 피라미드의 최상위층-백인 중산층 남자-자리를 걷어 차 버린 본스타인은 한층 더 과격하게 말한다. 진짜 여자 혹은 진짜 남자라는 것은 애초에 없으며 모든 개인에게는 젠더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여자 혹은 남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을 향해, 혹시 지배문화에 설득당한 적은 없는지 찬찬히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우리의 젠더를 지정하는 지배문화의 기준은 생각보다 매우 허술하며,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래 기득권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젠더는 가장 근본적이고 거대한 계급이다.


“위계질서의 틀로 사용할 성별이 없어지면 젠더 체제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구성원은 아마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타인들에게 휘두르는 권력이 좋은 것이라고 믿으며(내 생각엔 어리석은 짓이다!) 그걸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 때문에 그 좋은 권력을 잃을까봐 공포에 질려 있다. 난 여기서 ‘남성 특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젠더 체계가 무너지면 당장 저녁 밥상에서 누가 젓가락을 놓아야 할지 싸워야 하는 현실 앞에서 본스타인의 주장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그 말만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이게 이 시대의 진정한 힐링 서적이다.



글 황수현 한국일보 문학 기자. 패션과 음식을 거쳐 문학과 미술까지, 문화 전반을 10년째 취재 중이다.


* 이 글은 「문화+서울」 7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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