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네가 그 봄꽃 <알레산드로 멘디니>
한국의 판화가 이철수(61)와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84). 국적도, 나이도, 장르도 다른 두 예술가는 묘하게 닮았다. 무엇보다 작품을 보는 순간 “아! 이것은 누구의 작품”이라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판화가 이철수의 경우 자신의 작품에 ‘철수’라는 이름의 낙관을 새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예술가 모두 작품 안에 낙관처럼 분명한 조형미와 철학이 존재한다. 그것은 미끈하게 잘 빠진 세련미라기보다 투박하고 때론 유머러스하며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미에 가까운 것이다.
이철수 신작 판화전 <네가 그 봄꽃 소식 해라>, 10. 21~11. 3,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
판화가 이철수가 원불교 경전 <대종경>에 빠졌다. 지난 5년 동안이다. 내년이면 원불교가 창시 만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원불교 100주년 기념 성업회 쪽에서 5년 전쯤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이후 작가는 1년 반 넘게 대종경을 두 번 정독했다고 했다. 그리고 3년여 동안 다른 작업은 일체 접은 상태에서 대종경 말씀을 추려내고 에스키스(Esquisse)를 만들고 목판을 새겼다. 총 200여 점이 넘는 대작이다. 경전 말씀에 개인의 생각을 주석으로 달아 특유의 간결한 드로잉과 함께 실었다. 원문 그대로가 좋은 글에는 주석을 아예 뺐다.
사실 이철수는 1990년대 이후 참선을 중시하는 선불교 작업에 천착하고 있었다. 그는 아우라가 넘치는 선불교에 비해, 원불교는 ‘푹 익은 고구마’처럼 날카롭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애초에 한글로 되어 있는 경전이라 번역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대중 교양서가 되기에 손색없는 조건이었다. 그가 꼽은 말씀들은 대게 이런 것들이다. ‘사나운 개가 그 동류에게 물려 죽게 된지라’ ‘앉아서는 하고 서서는 못하는 선이면 병든 선이라’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요 만물은 사람의 사용할 바니’….
그가 원불교라는 특정 종교를 빌려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물질 개벽의 시대, 돈 있는 자나 돈 없는 자나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싸우고 서로를 해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경전이 전하는 삶의 가르침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원불교 설파에 나선 건 아니다. “무엇을 믿느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서 실은 “모두 다 믿는” 그이기 때문이다. 예수든 부처든 소태산(원불교 창시자)이든, 모두 다 하나의 지혜를 전하는 성현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노무현과 관련된 작품을 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너는 우냐 좌냐” 묻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딱지 붙이기, 혹은 편 가르기다. 그는 3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그게 박정희이든 노무현이든. 망가진 보수도, 망가진 진보도 모두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기에 그 망가진 속마음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 그것은 종교도 정치이념도 넘어서는 사람을 향한 작가의 진정성이다.
서울 전시가 끝나면 대구, 광주, 익산, 부산, 대전까지 전국 순회전이 이어진다. 전시를 놓쳤다면 책으로 만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전, 10. 9~2016. 2. 28,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으로 불리는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작품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식상하기까지 하다. 앤티크 소파에 도트무늬를 새긴 의자 시리즈 <프루스트(Proust)>부터, 인체 비례의 와인 오프너 <안나 G(ANNA G)>, LED 스탠드 램프 <아물레토(Amuleto)>와 테이블 조명 <오팔레(Opale)>, <캄파넬로(Campanello)> 등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품(혹은 상품)들이다.
멘디니는 50대 후반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카사벨라> <모도> <도무스> 같은 건축 디자인 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며 명성을 떨쳤다. 멘디니의 디자인은 추상미술처럼 난해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친근하다. 화려한 원색에 장식적인 요소도 많다. 특히나 단순하고 실용적인 북유럽 스타일이 대세인 요즘 트렌드에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많은 이유는 그의 디자인이 사람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알록달록 도트무늬, 형형색색 테이블 조명, 따뜻한 빛, 거기에 바티칸 성당의 종소리까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오감을 행복하게 채워주는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음에도 작품에 컬러를 많이 쓰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따뜻함을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컬러를 통해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 디자이너 최경원 씨는 그의 저서 <알레산드로 멘디니: 일 벨 디자인(Il Bell Design, 2013)>에서 “멘디니의 디자인은 대체적으로 유머러스한 가운데 순수미술을 방불케 하는 면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디자인으로서도 모자람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했다. 복잡하고 난해한 디자인을 만들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운의 걸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중으로부터 환영받는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것. 사람을 향한 디자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철학이 작품에 스며 있다.
멘디니의 전 생애 작품을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다. 초기 작업부터 근작까지 600여 점이다.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멘디니 오브제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그의 손때 묻은 드로잉들도 빼놓지 말고 꼼꼼히 살펴보자. 거장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글 김아미 헤럴드경제 라이프스타일부 기자
사진 제공 문학동네, 알레산드로 멘디니전 사무국
* 이 글은 「문화+서울」 1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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