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로창고극장 프로그램 소개
1975년 문을 연 이후 같은 자리에서 여러 주인의 손을 거치면서 44년간 총 279편의 작품을 공연하다 문을 닫았던 곳, ‘빠알간 피터’가 수만 명의 관람객을 만나 수만 개의 추억을 선사했던 곳. ‘유산’이라고 하기에는 숨겨진 탐험거리가 더 남아 있을 것 같은 삼일로창고극장은 마치 미지의 보물창고처럼 느껴진다.
삼일로창고극장이 처음 문을 열었다는 1970년대에 관해, 그 이후에 태어난 필자의 주변 세대는 사실 체험한 것이 별로 없다. 개인적인 간접 경험을 꼽자면 2005년에 관람한 연극 <관객모독>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극단 76단이 낳은 1978년생 <관객모독>에 1979년생 래퍼 양동근이 주연으로 등장했다. 당시 대학로 초입을 점령하고 있던 <웃음을 찾는 사람들>과 <개그콘서트> 사이에서 정장 차림의 래퍼가 뱉는 묘한 대사는 1970년대의 대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과거를 새롭게 전승하는 오늘의 연출과 배우를 이 극장에서도 만날 수 있다. 삼일로창고극장의 시작을 알리는 재개관 기념공연 시리즈 <빨간 피터들>은 1977년 초연 당시 4개월 만에 6만 관객을 돌파한 고 추송웅 배우의 1인극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오마주한 공연이다. 첫 번째로 6월 29일 공연을 선보인 <추ing_낯선자>(출연 하준호, 연출 신유청)에 이어 오는 7월 22일까지 매주 금~일요일 <K의 낭독회>(출연 강말금, 연출 김수희), <관통시팔>(출연·연출 김보람), <러시아판소리-어느학술원에의보고>(출연 최용진, 연출 적극)가 차례로 관객과 만난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1인극 열풍을 끌어냈다. 이로 인해 배우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라 불리는 <추송웅 연구>(1992, 안치운 지음)가 발간됐고, 오늘날의 <빨간 피터들>은 이 연구서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됐다. 책에는 추송웅 배우의 삶과 연기, 그의 예술적 원동력 등이 상세히 쓰여 있으며, 당대의 연극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배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질문을 받은 4명의 연출가, 4명의 배우가 각기 다른 고민을 1인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40년 전과 같은 장소에서 선보이는 것이다.
6월 22일 열린 재개관식에서는 일반 시민이 삼일로창고극장의 추억을 나누는 릴레이토크 프로그램이 마련돼 소소한 호응을 얻었다.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보며 데이트를 했던 1970년대 젊은 연인의 이야기, 극장 공연 포스터를 모으던 여고생의 이야기 등 다양한 추억이 소환됐다.
수십만 명의 관객이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며 다녀간 작은 극장은 1969년 창단한 극단 에저또가 만들었다. 삼일로창고극장 공연장에 딸린 부속동 1층 갤러리에서는 지금 한국 최초의 판토마임 전문 극단 에저또의 초기 활동을 조명한 아카이브 전시 <이 연극의 제목은 없읍니다>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삼일로창고극장의 원래 이름이 ‘에저또소극장’이었다는 것과 극장 설립 당시의 실험적인 소극장 문화를 보여준다. 에저또의 중심에 있었던 연출가 방태수의 개인 소장품에서 선별한 공연 리플릿, 티켓, 포스터, 프로그램, 대본 등 관련 책자를 비롯해 관련 기사, 개관 사진 및 공연 사진 등 160여 점의 자료를 전시한다. 또한 연출가 방태수, 마임이스트 유진규, 극작가 고 윤조병의 인터뷰와 주요 희곡 대본 5편을 열람용 자료로 소개하고 당시 희곡 검열과 공연법도 정리했다. 전시는 오는 9월 22일까지 진행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공연이 있는 날에는 주말에도 공연 시작 전까지 관람 가능하다.
한편 매표소 안쪽 지하공간인 언더홀에서는 1975년 첫 개관작이었던 <새타니>에서 영감을 받은 수목요일 작가의 설치전시 <언더홀 스파크>를 7월 21일까지 선보인다. 한때 비밀 아지트로도 쓰였던 공간이라 탐험하는 기분을 내기엔 적격이다.
에저또소극장을 직접 개관한 방태수 연출가는 소극장 신축개관 기념공연 프로그램북에 “다변형 창고극장이란 어떠한 틀의 연극을 하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가급적 어떠한 연극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공간 자체의 확보이며, 좁은 장소에서 최대한의 무대와 객석을 가질 수 있는 다목적 소극장이라 생각한다”고 썼다. 재개관한 삼일로창고극장은 1975년 개관 당시의 아레나 형태를 최대한 살려 60~80석 규모의 가변형 무대를 조성했고, 삼일로창고극장의 대표적 특징인 사방 등·퇴장이 가능한 구조 역시 보존했다. 재개관 기념공연과 기획 프로그램이 없는 날은 다양한 대관 프로그램으로 채워진다. 삼일로창고극장의 첫 번째 수시 대관을 통해 총 9개 공연이 7월부터 11월까지 진행 될 예정이다.
삼일로창고극장의 운영 방향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술창작 플랫폼으로서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운영위원회가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매년 무수히 배출되는 연극 관련 졸업논문에 주목하여 논문을 수행할 수 있는 무대를 저자에게 제공하는 <퍼포논문>(8월 17일~26일), 개방성을 가진 장소가 될 수 있도록 2주간 극장의 모든 공간을 점거하는 <창고개방>(가제, 12월 10일~23일), 운영 방향을 논의하는 좌담 프로그램 <창고포럼>(6~12월, 격월 1회), 만남·발견·확장을 키워드로 주제를 선정해 함께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창고공부방>(6~7월, 11~12월), 주체적인 예술문화 형성에 관심 있는 그룹 간의 만남의 자리 <창고사랑방>(6~12월, 매월 마지막 주 1회) 등이 있다.
연극을 이론화한 텍스트를 다시 연극으로 환원하는 퍼포먼스인 <퍼포논문>은 2편의 공연으로 구성된다. 프랑스 렌느대에서 박사논문 <재현 불가능한 것을 다루는 동시대 공연의 몸의 장치에 대하여>를 집필한 목정원은 <노래의 마음>(가제)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전문사 과정 논문으로 <실재의 연극>을 발표한 연극저술가 김슬기는 <더 리얼>을 각각 3일씩 무대에 올린다. 8월 20일, 두 번째 <창고포럼>에서는 ‘연극연구자 혹은 연극 관련 대학원생이 예술하는 방법’을 주제로 한 좌담이 진행될 예정이다.
양동근은 2005년 <관객모독> 공연 당시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국서) 감독님은 감독님 나름대로의 자물통이 있고 저도 나름대로 있어요. 그런데 서로에게는 서로를 열 수 있는 키가 있어요. 그게 딱 열린 거죠.” 누군가는 이 새로 개방된 연극 보물창고에서, 우연히 열쇠를 발견해 그 나름대로의 자물통을 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쩌면 당신은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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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준걸(서울문화재단 미디어팀) 사진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