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등의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일과 삶, 여가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고 있다. 친목 도모를 위한 여가 모임이 주였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취향을 공유하거나 정보를 나누는 모임이 많아졌으며, 편의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혼자 여가를 즐기는 문화도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국민여가활성화 기본계획 발표 등 국민의 여가 문화 활성화와 ‘저녁 있는 삶’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있는 가운데 문화예술계 또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8월호 ‘테마 토크’에서는 최근의 라이프 트렌트와 주 52시간 근무제에 따른 여가 문화의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노동 시간 감소가 문화예술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보다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이 가능할지 생각해보고, 예술 활동이 일상이 되는 생활문화를 다시금 주목한다.
지난 6월, 문화체육관광부는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에 따라 국민의 여가 문화 활성화를 유도하는 방안을 담은 ‘국민여가활성화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노동 시간 감소와 함께 삶의 여유를 되찾으려면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지, 또 이를 위한 정부의 대책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내가 원하는 여가 활동, 어떻게 해야 할까?
2018년 2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7월 1일부터 종업원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에서는 주당 52시간 근로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주당 법정 근로 시간이 현행 68시간(평일 40시간+평일 연장 12시간+휴일근로 16시간)에서 52시간(주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으로 단축되면서, 하루 8시간씩 평일 40시간 일한다면 연장근로는 12시간까지만 허용된다. 이미 2004년 7월 1일부터 법정 근로 시간을 주 40시간(주 40시간 근무제 실시)으로 제한했지만, 여전히 노동 시간이 긴 한국사회에서 최대 근무 시간을 정해 야근이나 휴일근무를 더 이상 못하도록 제한을 뒀다.
많은 이들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통해 정시 퇴근 문화가 정착될 것이며, 주말이나 휴일근무가 사라져 개인적인 여가 시간이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야근수당 등 실질적인 소득이 감소하거나, 업무량 조정이나 인력충원 없이 제도가 실시돼 오히려 근무 시간에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생산성과 업무성과가 낮아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후자의 논의는 제외하고라도, 실제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저녁에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면서 즐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노동 시간 감소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여유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흔히 ‘나는 시간이 없어서 운동이나 문화 활동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해야 하지?’라고 고민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시간이 늘었다고 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활동에 참여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가에 대한 경험은 과거부터 경험과 체험을 통해 익숙해진다. 이를 ‘여가 경력’(leisure career)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자유 시간에 무엇을 스스로 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유아기나 아동기, 청년기에 경험하지 못한 활동을 중·장년기나 노년기에 새로 시작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어릴 때부터 꾸준히 경험하고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시간이 주어졌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때다. 오늘부터 6시에 퇴근하게 되었지만, 그 이후 정작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하고 싶은 활동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주위 사람들이 하는 대로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주말을 이용해 여행을 가고, 악기를 사 학원에 등록하기도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가에 대한 교육이나 시간 관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여가 활동을 찾고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셋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정하지 못한 경우다. 어렵게 내가 원하는 여가 활동을 찾아도, ‘어디 가서 누구와 함께하지?’라는 고민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그곳에 가면 나와 같은 초급자가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누구와 함께 다닐지…. 이런 막연한 생각 때문에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예전처럼 행동하게 된다.
일과 여가, 균형을 이루려면
노동 시간을 제한하여 여가 시간을 확보하는 문제부터, 여가 경력을 쌓기 위해 어릴 때부터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맞는 여가 활동을 찾도록 하며, 지역사회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저녁과 주말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6월 발표한 ‘국민여가활성화 기본계획’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계획이 담겨 있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여가 기반을 구축하고,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여가 서비스를 구현하며,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여가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추진 전략을 마련했다. 첫째, 국민들의 여가 권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노동 시간 단축 제도의 연착륙을 유도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잃어버린 삶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 시간 총량 관리와 근로자의 휴가권을 강화하는 방안이다. 그리고 생활밀착형 지역 여가공간을 확대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공간 기준을 제시한다. 둘째, 수요자의 맞춤형 여가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장애 없는 여가 서비스를 구현하여 모두가 접근 가능하도록 한다. 셋째, 질 높은 여가 서비스 제공을 위해 전문인력을 관리하고 관련 여가 산업을 지원하는 방안이다. 이러한 여가 참여 확대와 여가 접근성 제고, 여가 서비스 혁신을 통해 일과 여가의 혁신적인 균형을 꾀하는 것이 국민여가활성화 기본계획의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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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소영(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갑자기 생긴 여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난감하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무료한 일상을 고민하는 이들이 고유의 취향을 계발하고 취미를 즐길 방법을 찾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여가 문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한국사회에서도 조금씩 ‘우리’보다 ‘나’를 위한 문화를 즐기는 발판이 마련되는 모양새다.
‘관계 모임’에서 ‘취향 공유’로
직장인 김동규 씨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저녁 러닝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1회당 5,000원의 참가비를 내고 일정 시간 한 장소에 모여 호스트의 주도하에 운동을 한 후 헤어진다. 회차별로 참석이 가능하며 매번 참석자도 다르다. 친목이 아니라 오직 운동을 목적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김 씨는 “‘불필요한 ‘치맥’ 모임이 없다’는 소개에 이끌려 참가했다”며 “지인들과 운동하려면 서로의 상황에 맞춰야 해 결국 또 다른 부담이 되는데 오로지 나만의 여가를 즐길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김 씨뿐 아니라 최근 클라이밍부터 가죽공예, 케이크 만들기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생산적으로 여가를 보내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연결해주는 스마트폰 앱도 성장하는 추세다. 2013년 서비스를 시작한 ‘프립’은 2016년 앱을 출시한 후 회원 수가 44만 명으로 늘었다. ‘프립’을 통해 루프탑 요가 클래스를 운영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얼리브라운지’의 박은호 프로그램 매니저는 “스트레스로 지친 직장인에게 ‘대안이 되는 삶’을 모토로 강좌를 제공한다”며 “혼자 와도 어색하지 않도록 교류할 수 있는 라운지를 마련해 차별화했다”고 말했다.
숙박 서비스로 시작한 에어비앤비도 2016년 소셜 액티비티를 연결하는 플랫폼 ‘에어비앤비 트립’을 출시했다. 여행자를 위한 투어 프로그램은 물론 요리, 세라믹, 공예 등의 강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에서 약 200개가 운영 중이다. 통계청의 사회조사를 보면 여가가 생기면 하고 싶은 활동으로 취미와 자기계발을 꼽은 사람이 2015년에는 34.2%였는데, 지난해에는 46.4%로 증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단체 생활이나 관계 형성에 중심을 뒀던 여가 문화가 다양한 공유 플랫폼의 등장으로 점차 개인의 취향과 기호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4월에 문을 연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취향관’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사교공간이다. ‘일상을 취향으로, 취향을 일상으로’를 모토로 내건 취향관은 예술, 사진, 책 등의 주제로 모임을 갖는다. 참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이나 직업, 나이를 모르지만, 공통의 관심사와 ‘기꺼이 대화할 의사’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들이, 데이트에서 ‘나 홀로’ 감상으로
“정시에 퇴근해 갑자기 시간이 생길 때 가끔 참여형 연극을 혼자 보러 가요. 나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주변 눈치 볼 것 없이 무대에 참여하는데 완전 짜릿해요.” 직장인 정민지 씨는 혼공·혼영족(혼자 공연·영화를 보는 관객)이다.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공연과 영화를 즐긴다는 정 씨는 시간과 취향 선택의 자유로움을 혼공·혼영족이 된 이유로 꼽았다. “서로 일하는 장소나 시간이 다르니 지인들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고, 상대방의 취향까지 고려하려면 더 맞추기 어렵다”며 “내 마음대로 작품을 고르고, 더 크게 웃거나 마음껏 울 수도 있는 혼영·혼공이 언제부턴가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CGV리서치센터와 롯데시네마의 통계를 봐도 1인 관객은 가파르게 늘고 있다. 2012년에는 CGV를 찾은 1인 관객이 전체의 7.7%에 불과했던 반면, 2014년 9.2%, 2016년 13.3%로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에는 17.1%에 이르렀다. 롯데시네마도 2013년 8.1%였던 1인 관객이 지난해 12.5%까지 늘어났다.
연극, 뮤지컬, 콘서트, 오페라, 무용 등 티켓 가격이 비교적 비싼 공연계에서는 혼공족의 비중이 훨씬 높다.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1인이 티켓 1장을 구매한 비중이 2005년 11%에서 지난해 43%로 절반에 가까운 수준으로 증가했다. 과거에는 연인 간의 데이트나 가족 나들이로 영화관, 공연장을 찾는 관객이 대다수였다면, 이제는 작품 자체를 즐기려는 1인 관객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흐름에 따라 관련 마케팅도 생겨나는 추세다. 최근 개관한 서울 영등포구 ‘씨네Q’ 신도림점은 아예 혼영족을 위한 상영관을 마련했다. 리클라이너(전자동 각도조절) 의자 30석 규모의 프리미엄 상영관(7관)에는 좌석마다 칸막이가 설치돼 있다. 의자의 각도를 높이면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스크린뿐. 타인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휴대전화 불빛에 방해를 받을 일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오더라도 영화관에서는 철저히 혼자 영화를 봐야 한다.
공연계에서도 혼공족을 겨냥한 마케팅이 종종 진행된다. 지난해 2월 <삼성카드 스테이지> 공연에는 혼공족을 위한 전용석이 마련됐다. 공연제작사 신시컴퍼니도 뮤지컬 <아이다> 공연에 1인 예매 관객에 한해 전시회 티켓 등 경품을 제공했다. 인터파크도 지난해 추석 연휴 한 공연을 여러 번 보는 ‘회전문 관객’과 혼공족을 대상으로 경품을 추첨했다.
저녁이 있는 삶, ‘혼족’ 시대 열릴까?
근무의 연장이라 여겨지던 회식, 사내 동아리 문화가 줄어들고 혼자 문화를 즐기는 ‘혼족’이 증가하는 추세와 맞물려 심야 상권도 하락세다. 통계청의 통계를 봐도 지난해 주점업의 생산지수는 100.1로, 2008년 135.4와 비교해 대폭 하락했다. 반면 커피나 과일주스 등 ‘비알코올 음료점업’은 같은 기간 87.2에서 135.2로 올라 두 업계의 상황이 역전됐다. 최근 주 52시간 근로제를 시행하는 기업이 늘고, 불필요한 회식을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가 혼족 시대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은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13년 커버스토리로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을 다룬 바 있다. <타임>은 밀레니얼 세대가 기성세대의 눈에는 이기주의자로 보이지만,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와 기술을 접해 거대 기관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개척자라고 진단했다. 방송사와 유튜버, 언론사와 블로거가 경쟁하고, 산업 전체를 앱 제작자가 위협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9·11 테러,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나 아랍의 봄 등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불안정한 시대 상황을 겪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않은 이들은 시스템과 싸우기보다 ‘실용적 이상주의자’를 자처한다. 이념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행동가’이며 낡은 시스템이 해체되는 흐름에 적응한 신인류다.
최근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화제를 모은 1989년생 바텐더 오카시오 코테즈는 밀레니얼 세대에 호소한 경우다. 그는 기성 정치인이 “우리 동네에 살지도 않고, 자녀를 우리 학교에 보내지도 않는다. 우리가 마시는 물, 공기조차 공유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풀뿌리 선거운동을 했고 서민 계층의 실질적 변화를 외쳤다. 그 결과 유색인종 여성이 민주당 10선 의원을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국내의 ‘소확행’ 바람도 이 흐름과 멀지 않다. 거대한 이념에 호소하고 시스템을 바꾸려 하기보다 개인과 가족의 소박한 일상을 중요시하고 실질적 의미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더 활발해질 것이다.
개별 취향에 따른 여가 문화 다양화 대비해야
이러한 개인주의의 강화는 더 이상 우려해야 할 흐름이 아니다. 롯데시네마가 2016년 하반기 개봉 영화 중 혼영족이 선호한 영화를 조사한 결과,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 순이었다.
<아가씨>를 제외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평단에서는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다. 즉 1인 관객은 상대방의 취향을 고려하는 가족, 연인 관객보다 과감한 취향 선택이 이뤄지므로, 개별 취향에 맞춰 더욱 다양한 콘텐츠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다만 이런 콘텐츠를 국내 산업이 충실히 제공할 수 있는지는 우려해야 할 부분이다. CGV리서치센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개봉 영화 관객 수 상위 10개 작품 중 혼영족 비율을 비교했는데,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본 <신과 함께-죄와 벌>, <택시운전사>는 8, 9위로 밀려났다. 1위는 <범죄도시>(19.5%)였지만 그다음으로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18.3%), <킹스맨: 골든 서클>(17.3%) 등 마니아층이 두터운 프랜차이즈 외화가 높은 순위에 올랐다. 국내 영화계가 여전히 개별적 마니아를 위한 영화보다는 기존 흥행 공식에 충실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20, 30대는 스마트폰 앱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손쉽게 취미와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지만, 중·장년층이 여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지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사실상 50대 이상이 서울시 인구의 21.9%가량을 차지하지만, 이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통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2016년 설립된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50대 이상 세대의 재취업 및 여가를 위한 강좌를 제공한다. 또 자치구별 문화센터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더욱 다양한 취향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으로 다가올 여가 문화의 변화는 사실상 예견됐던 일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유행어가 됐고, ‘워라밸’이라는 단어도 생겼다. 일과 여가의 경계가 없었던 기성세대의 논리는 젊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기성세대에게도 이제 제대로 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새로운 여가 문화의 흐름이 생겨나면서 문화산업은 물론 주점, 카페 등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에게까지 엄청난 변화가 일 것으로 예상된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여가 문화가 안착되고, 산업도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정확한 분석과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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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민(동아일보 기자) 사진 제공 얼리브라운지, NEW, 취향관
7월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됐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이 기존 최장 68시간에서 최장 52시간으로 줄어들면서 한국사회의 직장 문화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자연스럽게 야근이나 회식은 줄어들고 퇴근 시간은 앞당겨졌다. 이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저녁이 있는 삶’이 우리 생활 속으로 성큼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문화예술계는 이러한 일상의 변화를 도약의 기회로 삼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가 도입된 이후 극장 관객이 늘긴 했어요. 이거 한다고 큰 영향이 있을까 했는데 정말 관객이 늘었더라고요. 직장인 대상 프로모션을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멀티플렉스 극장 관계자)
7월 이후 넥타이를 맨 관객이 전보다 더 눈에 띄긴 해요. 하지만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 확 늘어난 것 같진 않아요. 과연 주 52시간 근무가 관객 증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까요? (대학로 극단 관계자)
14년 전 도입된 주 5일 근무제가 한국인에게 ‘주말’을 찾아줬다면, 주 52시간 근무제는 ‘저녁’을 돌려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아울러 전례를 살펴보면 라이프스타일의 획기적인 변화는 관련 산업에 커다란 기회를 제공했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도입된 주 5일 근무제는 여행, 레저, 숙박, 아웃도어 업계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주말 이틀간 연휴가 보장되면서 도심을 떠나 1박 2일의 짧은 휴가를 떠나는 라이프스타일이 정착됐고, 캠핑용품, 아웃도어 의류 등이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다. 삼성패션연구소에 따르면 2007년 1조 5,000억 원에 불과했던 아웃도어 시장 규모는 주 5일 근무제 시행이 완료된 2011년 4조 원으로 성장했고, 2012년 5조 4,000억 원, 2013년 6조 9,000억 원, 2014년 7조 원을 기록했다.
주 5일 근무제가 레저, 아웃도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면 주 52시간 근무제는 영화, 공연, 전시 등 문화산업에 단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향후 문화예술을 통한 여가 생활을 희망하는 응답자의 비율은 38.5%에 달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안겨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문화예술계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를 재도약의 기회로… 발 빠른 움직임 보이는 영화계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이 감지되는 곳은 영화계다. 영화계는 예전보다 일찍 퇴근한 직장인이 큰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이 바로 영화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같은 기대는 영화계만의 막연한 바람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대신증권은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의 영향으로 CJ CGV가 3분기에 역대 최대 실적을 낼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CGV가 연합뉴스와 함께 6월 28∼29일 CGV 회원(20∼44세) 6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관객 10명 중 7명은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영화관람 횟수를 늘릴 의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전의 주중 여가 활동으로 TV 시청(27.1%)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극장 영화관람(11%), 게임(10.4%), 극장 외 영화관람(7.8%)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근무제의 정착으로 여가가 늘어날 경우 주중 늘리고 싶은 여가 활동으로는 극장 영화관람(16.8%)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헬스(12.4%), 맛집·카페(10.3%), 드라이브(6.3%), 게임(6.1%) 등을 늘리고 싶다고 답했다.
과거 주 5일 근무제 시행 때 극장 관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전례도 있다. 주 5일제가 도입된 2004년 6,825만 명이던 극장 관객은 2005년 1억 2,335만 명으로 배 가까이 급증했다. 물론 멀티플렉스가 급증하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극장과 관객 모두 포화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하나, 근로 시간 단축이 재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서정 CJ CGV 대표는 7월 10일 CGV 강변에서 열린 ‘2018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에서 “최근 국내 영화상영업은 정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나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은 희망적인 신호를 주고 있다”며 “주중 관람객의 증가를 기대하며 어떻게 트리거(방아쇠)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극장들은 평일 CJ CGV 대표는 7월 10일 CGV 강변에서 열린 ‘2018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에서 “최근 국내 영화상영업은 정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나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은 희망적인 신호를 주고 있다”며 “주중 관람객의 증가를 기대하며 어떻게 트리거(방아쇠)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극장들은 평일 저녁 직장인의 발길을 붙드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저녁식사와 영화관람을 연계하거나, 직장인 맞춤 할인 이벤트 등을 진행한다. CGV는 7월 2일부터 8월 30일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 오후 7시부터 8시 59분 사이에 시작하는 일반 2D 영화를 예매할 경우 2,000원을 할인해준다. CGV 씨네드쉐프는 ‘워라밸 패키지’를 출시했다. 2인 영화관람권과 각 극장 대표 셰프가 마련한 세트 메뉴로 구성되며, 기존보다 약 20% 할인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롯데시네마도 7월 2일부터 24일까지 직장인을 대상으로 영화관람 할인 혜택 이벤트를 진행했다. 평일 오후 6시부터 10시 59분까지 사원증을 가지고 전국 롯데시네마 직영관을 방문하면 관람료 및 콤보를 할인해줬다. 메가박스도 ‘소확행’을 추구하는 소비 트렌드가 강화될 것으로 보고 제휴 및 할인 이벤트 등 각종 프로모션을 강화하기로 했다.
규모는 작지만… 팔 걷어붙인 공연·전시계
영화계와 비교하면 산업 규모는 작지만 공연계 역시 직장인 대상의 할인 프로모션을 늘리거나 공연 시간을 앞당기는 등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공연 전문회사 ‘연극열전’은 직장인 대상 티켓 할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 중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티켓 가격은 전석 5만 원이지만 ‘야근 넘어 도망친 직장인 할인’을 적용받으면 20%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이는 실제 티켓 판매 증가로 이어졌다. 7월 2∼8일 직장인 대상 할인 티켓의 판매량은 전 주 대비 141% 상승했다. 또 9∼12일 직장인 할인 티켓 판매는 전 주보다 61%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연극열전 관계자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함께 직장인 할인 티켓 판매가 대폭 증가한 것으로 볼 때 근로 시간 단축이 공연 관객 증가에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다”고 분석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첫날인 7월 2일, 공연제작사인 신시컴퍼니는 일찍 퇴근한 직장인을 타깃으로 평일 공연에 한해 뮤지컬 <시카고>의 티켓을 50% 할인했는데, 1,000장 이상이 판매됐다. 신시컴퍼니 관계자는 “평일 공연은 원래 할인율을 적용해도 티켓 판매가 확 늘기 어려운데 반응이 상당이 좋은 편”이라며 “저녁 여가가 늘어나면서 평일 저녁 공연도 할인율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의 퇴근 시간이 앞당겨지면서 공연 시간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현재 대부분의 평일 공연은 퇴근 시간을 고려해 오후 8시에 시작되지만, 하반기부터 공연 시간을 앞당기는 곳이 늘어날 전망이다. 두산아트센터는 하반기 공연 예정인 연극 <외로운 사람, 슬픈 사람, 힘든 사람>의 시작 시간을 오후 8시에서 오후 7시 30분으로 당기기로 했다. 사실 퇴근 시간에 맞추려면 오후 8시에 공연을 시작할 수밖에 없으나, 2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을 고려할 때 오후 8시 공연은 너무 늦다는 지적이 많았다. 아울러 두산아트센터는 주로 청소년이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백스테이지 투어’를 하반기 중 직장인 대상으로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두산아트센터 관계자는 “그간 직장인 관객은 공연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퇴근 시간이 당겨지면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 공연 시작 전 무대 뒤의 모습까지도 여유 있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계기로 직장인을 타깃으로 한 패키지 문화상품을 준비한 곳도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퇴근 이후 워라밸을 위한 ‘한夜(야)광 패키지’를 마련했다. 이는 세종문화회관이 직접 기획·제작한 작품관람과 광화문 인근 식사 및 숙박 등을 묶은 것이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단의 <썸머클래식>, 서울시합창단의 <신나는 콘서트>,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의 <오늘 하루 맑음>, 전시 <드가: 새로운 시각> 등을 식사와 숙박이 연계된 패키지로 구매할 경우 최대 30%까지 할인받는다.
미술계에서는 미술관을 중심으로 기존 야간 개관 프로그램을 보다 다양하게 꾸리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주 52시간 근무가 예고된 3월부터 금·토요일은 평소보다 3시간 늦은 오후 9시에 문을 닫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매월 둘째 주,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오후 10시까지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야간에는 단순한 전시관람 외에도 영화, 음악 등과 연계된 행사를 진행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현재 직장인과 함께하는 문화예술 체험 행사들이 큰 호응을 얻는 만큼, 주 52시간 시대에 맞춰 앞으로 더 다양한 참여 프로그램과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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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승욱(연합뉴스 기자) 그림 최지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