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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저김 Sep 22. 2022

EP 3. 마케팅을 하지 않는 전직 마케터

a.k.a. 초보 자영업자의 객기

광고대행사를 거쳐서 마케팅 업무로만 약 12년 정도 커리어를 쌓아온 뒤에 퇴사하고 자영업자의 삶을 시작하자, 다들 내가 그동안 커리어를 살려서, 뭔가 마케팅은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가게 오픈 이후, 한 달 넘게 네이버 플레이스 등록도 안 하는 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성화에 못 이겨, 한 달 뒤에는 네이버 플레이스에 등록했다.


사실 등록 심사가 3일 내외? 정도는 걸린다고 안내 메시지가 나오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신청한 다음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마케팅 대행사의 광고영업 전화였다.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지? 하고 보니,

네이버에서 심사 통과가 되어, 상호등록도 완료됐다는 문자가 와있었다.


이게 시작이었다.

온갖 광고영업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전직 마케터와 현직 마케터의 창과 방패 싸움이 시작됐다.


대행사 직원들이 그래 봐야 할 수밖에 없는 미끼 상품과 함께 현혹되길 바라는 말들로 날 꾀려 했지만,

매일 메일을 통해 들어오던 광고 상품 제안서가 스팸메일함으로 자동 분류됐던 것처럼

벽에 말하는 기분이 들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하나 둘 차단하면서 이제는 주 1-2회 수준의 전화만 받으면 되는 수준으로 안정을 찾았다.


다들 왜 마케팅, 광고일만 해놓고서 아무런 것도 하지 않냐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열심히 하는 것이 없을 뿐, 나름 조금씩 꼼지락 거리긴 한다.)


우선, 술과 책을 함께 즐기는 타겟 중 판교 생활권인 사람들을 찾기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지인들이었다.

지인들을 통해, 한 번씩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고,

2호점 지원자들은 6명째 발생했다.


그냥 내가 만든 공간을 좋아해 주고,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와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모르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이, 수입면에서는 당연히 좋겠지만..

아직은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시간과

지인들이 찾아와서 함께 수다 떠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돈이 다 떨어지면, 아마 이런 객기도 더 이상 부리지 못할 테니… 지금 더 즐겨둘 생각이다.)


MBTI에서 I만큼은 확실한 성향임에도,

모르는 손님들과 대화 나누는 것 역시 생각보다는 꽤 즐겁다.


공간에 대한 칭찬을 해주고, 칵테일 맛을 칭찬해주고,

별 것 아닌 (그래도 나름 자체 제작인) 북마크 선물에도 감사인사를 받고,

사진 찍어도 되냐며, 여기저기 사진 찍는 모르는 손님들을 보면 꽤 행복해진다.


북바 탄생 과정이라는 첫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마케팅, 광고를 10년 넘게 했음에도.. 마케팅, 광고의 부질없음을 체감하는 순간이 훨씬 많았다.   

광고주 : 실무담당자부터 최종 의사결정권자까지…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결국 배는 평범한 바다로 간다… 배가 산으로 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행사 : (대행사 직원들 역시, 모두 생각은 다르다) 자기들 creative에 취해, 큰 그림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광고주가 제대로 가이드를 주지 못한 탓도 꽤 크다.


매체사 : 퍼포먼스가 확실한 광고 상품을 제시하기 급급한 경우가 많다. 클릭수, 랜딩페이지 유입 수가 전부가 아닌 경우도 꽤 많다. 역시, 광고주도 내부 보고를 위해 결국에는 수치상 좋은 결과(인 것처럼 포장하기 쉬운)를 보고하기 위해 정작 챙겨야 할 목표는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공간에 대해 케케묵은 SWOT 분석도 하고… 상권 분석이라도 하고… 하면 하겠지만…

안 하고 싶다!


그냥 자연스럽게… 천천히 망해가는 걸 택하고 싶다.

내 생계가 달린 문제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이 공간이 내 일터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출퇴근하고 싶지 않다.

오늘은 이 책을 읽어야지, 오늘은 이 영화를 봐야지, 오늘은 누가 온다고 했는데.. 라면서 출근하고, 행복하게 퇴근하는 요즘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행복의 근원이 되는 이 공간을 억지로 망치는 일 따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는 사람이 오는 것은 좋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늘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인들한테 살갑게 하는 스타일도, 잘 챙기는 스타일도 아니다 보니

인맥 넓은 사람들을 부러워한 적도, 인맥을 넓혀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남의집'도 시작해봤고, 트레바리도… 하나 더 늘려볼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넷플연가라는 커뮤니티 서비스도 시작해볼까 하고 역시 고민 중이다.)

북씨 모임 공간으로도 얼마든지 제공하고 있고, 글쓰기 모임 같은 다른 사모임도 조직 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직은 여기까지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독서모임을 하는 줄도 모르는) 기존 내 친구들이 알면… 놀랄만한 변화긴 하다.


지인들에겐 아지트처럼,

모르는 사람들에겐 편하게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렇게 조금씩 망해가 보려고 한다.


여전히 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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