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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캣 Jul 12. 2024

[오늘뭐볼까] 흑산도에서 건진 팔팔한 명화

우리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많이 봐왔다. 천만 관객을 넘긴 <왕의 남자>부터 <라디오스타>, <황산벌>에 이르기까지 흥행 작품도 여럿 냈다. 이번에 이준익 감독이 관객들을 위해 내놓은 작품은 정약전(설경구)의 이야기를 그린 <자산어보>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류승룡)의 형으로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된 인물이다. 그는 유배 생활 16년 동안 '자산어보'라는 해양생물학 서적을 집필했다. 영화는 그가 어떻게 자산어보를 지을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또 그에게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잔잔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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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서학(크리스트교)이 조선에 퍼져 박해받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정약종, 정약용, 정약전 3형제는 서학을 믿은 죄로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된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창대(변요한)라는 청년을 만난다. 창대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다. 흑산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지내기는 하지만 한학을 배워 출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정약전은 창대를 통해 흑산도 인근 수산물의 형태와 습성에 눈을 뜬다. 창대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 대신 정약전은 물고기에 대해 배우기로 한다. 


정약전은 성리학에 경도된 조선의 현실을 개탄하며 실학 정신으로 자산어보를 완성해나간다. 창대는 성리학 경전 대신 물고기에 대해 조사하는 스승을 이해할 수 없다. 창대는 양반인 아버지에게 자신을 양자로 삼아달라고 청하며 과거를 봐 진사 자리에까지 오른다. 창대는 실학을 추구하는 정약전과 자신의 길은 다르다며 스승과 제자의 연을 끊는다. 하지만 창대는 목민관이 되고자 하는 꿈과 군포 비리에 물든 현실 사이에서 절망하게 된다.


설경구가 연기하는 정약전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백성도 왕도 없는 이상 세계를 추구한다. 그에게 있어 서학은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 순교할 정도의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백성이 보릿고개 때 배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물고기를 발견해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 정약전이라고 해서 완전히 계급의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화가 나면 ‘상놈의 자식’이라고 창대를 욕하고 역정이 심하게 나면 벼루를 던지는 정약전의 모습은 인간적이다. 그는 동생 정약용과는 길이 다르다고 말한다.


류승룡이 연기하는 정약용은 인자한 양반이다. 다산초당을 열어 여럿 제자를 배출하고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역사에 길이 남을 저작들을 남긴다. 정약전과 같이 배교한 류승룡에게는 성리학의 원리가 아직 절대적이다. 그의 이치는 “백성이 땅을 논밭으로 삼듯 목민관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란 말로 정리된다.


창대가 진사 벼슬을 얻어 나주 목사 밑에서 실무를 배울 때 군포와 관련된 비리를 목격한다. 나라로부터 녹봉을 받지 않는 아전들은 죽은 사람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에게도 군포를 매긴다. 이때 정약용의 이치는 관리가 백성을 수탈한다는 의미로 전환된다. 창대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처럼 청렴한 목민관이 되고자 하나 벼슬을 돈을 주고 사고파는 후기 조선 시대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자산어보는 특이하게 흑백으로 화면이 처리되어 있다. 때문에 영화보다는 한 편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극의 흐름도 느리고 느긋한 편이다. 이 점이 요즘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할 수 없는 점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자산어보의 잔잔한 이야기 구성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내부적으로 조직된 갈등 요소가 첨예하기 때문이다. 먼저 외부적인 갈등 구조를 보면 성리학과 서학 간의 대립이 있다. 조선에 전래된 서학을 통해 기독교도로 개종한 정약전 형제는 교황청에서 내려온 제사 폐지령 때문에 일부는 배교하고 일부는 순교하는 쪽을 택한다. 


이미 일본은 서양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화된 문물을 받아들여 조총을 만들고 이를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데 쓰고 있던 시절이었다. 개화 대신 쇄국을 택한 조선의 운명은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지식 체계인 성리학 안에서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서학은 단순히 기독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 배에서 떨어진 지구의가 상징하듯이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했다. 조선이란 나라가 맹자와 공자를 읊을 때 이미 서양의 나라들은 거대한 배를 건조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이른다. 이 점을 깨달은 정약전은 성리학으로서 서학을 받아들인다는 말로 자신의 사상 변천을 표현한다.


또 하나의 대립 요소는 정약전의 자산어보, 표해시말로 대표되는 실학적인 사상과 성리학의 세계 사이의 갈등이다. 표해시말은 작중에서는 짧게 언급되지만 문순득이라는 어상이 풍랑에 휩쓸려 필리핀까지 표류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오는 육로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온 표류기를 대필한 것이다. 문순득은 당시로서는 전혀 경험해볼 수 없는 범 동아시아적인 지식(필리핀어, 오키나와어)을 갖추게 된 인물이다.


이 인물의 표류 일정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또한 외국어를 한글로 음차 하여 발음을 적어서 언어학적, 인류학적 가치가 있는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이 사례 역시 정약전이 가지고 있던 실학 정신의 발로로 이론적인 가치에만 치중하지 않고, 실제로 따져보고 확인하여 구체적인 사실에 천착했던 흔적이다.


영화에서 정약전은 자신의 이상 – 상놈도 양반도 없는 나라 – 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자산어보란 해양생물학서를 저술함으로써 생의 불꽃을 다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정약전에게 자산어보는 단순한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갖춤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더 낫게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다.


정약전은 문어나 생선을 직접 해부해 그 속의 생물학적 지식을 습득하려 한다. 천한 서얼 출신의 창대에게 ‘거래’라는 명목으로 글공부 대신 물고기 공부를 청하는 대목은 그가 신분 격차조차 따지지 않고 자연과학적 지식을 맹렬히 추구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실학은 당대의 사상 조류가 아니라 후대에 재정의된 구분 방법이다. 현대에 와서 정조 시대의 실학사상을 영화로 재구성함은 한국이 개발 시대를 통해서 추구해왔던 근대성의 재발견 과정이다. 조선 사람이 유교 사상을 넘어 과학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한국 사회가 변천해온 비가역적인 발전 과정을 은유하고 있다.


영화 내내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이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고자 하는 초월 감각이다. 정약전이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것은 조선이란 병든 나라를 성리학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원했던 이상 세계를 이루기 위한 꾸준한 발걸음이 바로 '자산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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