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스타벅스에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 물론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만 새로운 메뉴가 나온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라고 하는 곳에는 전부 다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 매실 피지오 뭐라고 하는 건데 이름이 너무 길다. 이전 직장에서 공짜로 받은 스타벅스 카드 3만원권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걸로 결제했다. 오, 공짜의 힘.
사실은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는 가기가 싫었다. 예전에 두페이지 단편소설이라는 사이트에서 운영자와 다른 회원들과 함께 갔던 앤프러사이트에 가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면 10분 안에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노트북을 들고 가기에는 내 에이수스 비보북이 너무 무거웠다. 결국 스타벅스를 앤프러사이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현충일이라서 사람들이 모두 쉬러 나왔고 1인석 자리에는 젊은 사람들이 노트북과 함께 진을 치고 있다. 아침에 오늘의 커피를 마셨지만 점심이 되자 정신이 몽롱해졌고 지원한 일자리에서 다시 한번 미팅을 하자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몸을 씻고 뛰쳐나왔다. 여기는 스타벅스가 아니라 앤프러사이트다. 앤프러사이트다.
나는 다시 10년전으로 돌아가 앤프러사이트에 도착해 있다. 다른 회원이 종이를 접어서 두페이지 단편소설이라는 글씨를 적어놨다. 5명 정도일까. 아마 그 정도.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한다. 운영자는 동진이라는 이름의 30대 남자인데 그를 보면 몇년 전에 만났던 웹진 볼록거울의 운영자가 떠오른다. 우리는 홍대에 위치한 상파울로라는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줄담배를 피워댔고 나는 담배연기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 글을 읽고 평하는 합평회라는 것인데 안경을 쓴 그녀는 즉석에서 내게 볼록거울의 필자가 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했고, 두달 후에 나는 볼록거울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
예전에 볼록거울에서 필진으로 활동했던 등명훈이나 곽불식 같은 작가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곽불식 같은 작가는 요즘 tv에 너무 많이 나오고 밀리의 서재 메인 화면에도 매일 떠 있어서 피할 수가 없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가 볼록거울에서 쫓겨나게 된 사연이 떠오르고. 물론 모든 것이 내 잘못이지만. 그런 일을 떠올리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예전에 합평회에서 만났던 bcbc라든가, 그는 모 대학 교수가 되었고, 온라인에서 이름을 들었던 아래래라든가, 그는 괜찮은 장르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름들이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최근에 나는 직장을 그만뒀고 그 과정은 아름답지 못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둘 때마다 난리를 치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자괴감과 함께 우울 속에 빠져들곤 했다. 내 직업의 초반에는 어떻게든 작가로서 먹고 살고 싶어서 영화 시나리오, 게임 시나리오 동네를 기웃거렸고 나중에는 기업에서 콘텐츠 에디터로 일하기도 했다. 금방 잘렸지만. 여기까지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글솜씨를 가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직장에서 글 때문에 잘리고 말았다. 나는 사무직에 지쳤고 이제는 현장직을 하고 싶어서 구직 사이트에서 보안요원 공고를 클릭해 지원했다.
판교에 위치한 모그룹의 거대한 건물에서 일하는 것이었는데 그 건물은 모 회사의 자동차 R&D 센터였다. 11명이 한꺼번에 보안 요원 일을 하고 임원이 들어오면 문을 열어주고 엘리베이터까지 동승해주는 뭐 그런 업무라고 한다. 당연히 좋은 대학, 학벌을 가진 연구원들이 가득한데, 1층에는 건물 전용 스타벅스까지 있었다. 한참을 걸었던 나는 스타벅스에서 연구원들을 바라보며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단지 학교를 잘 나왔다는 이유로 이렇게 일자리가 갈릴 수 있을까. 누구는 9시 출근, 6시 퇴근에 시원한 에어컨을 쐬고, 누구는 주주야야휴휴로 밤을 새고 일하며 건물을 순찰하고 임원이라는 작자들의 의전을 담당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판교의 아파트촌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렸고, R&D 센터에서의 면접 경험은 더더욱 자존감을 하락시켰다. 더이상 하락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때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잡코리아와 사람인에 클릭을 해대며 수백군데에 입사원서를 넣어보지만 최근에 연락온 곳은 거의 없다. 이제 일이라는 걸 그만 둬야 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뭘하지? 당분간은 쉬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작년에 이미 후지락페, 섬머소닉, 글래스톤베리, 클락켄플랍, 하지케테마자레를 다녀오지 않았는가. 해외여행도 많이 했고 공연도 많이 봤다. 이제는 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출판사? 예전에 세워놨던 출판사를 가동시킬 때가 드디어 온 건가. 아니면? 아니면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매실 피지오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