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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캣 Jul 31. 2024

손목은 긋지 마세요

여자를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손목을 긋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시도때도 없이 커터칼로 손목을 그었고 상처가 아물 새가 없이 새로운 상처가 났다. 나는 그녀가 더이상 자해를 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냥 헤어지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녀는 좀 뚱뚱했고 화를 자주 냈다. 화를 내고 뚱뚱하다고 해서 다 자해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해를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그녀의 삶의 일부분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어 커터칼을 드륵드륵하는 소리를 들려줬다. 그리고 잠시 침묵. 매번 만날 때마다 손목을 확인해보는데 칼자국이 늘어나 있곤 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사귀었던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때는 아무런 자각이 없었다. 이 관계가 파탄에 빠지게 된 것이 온통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헤어지자고 말한 다음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전화를 해왔다. 번호를 차단해도 어떻게 해서인지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다.


죽어버릴 거야.


솔직히 나는 그녀가 죽는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나에게 계속 죽는다는 문자를 보내는 것은 큰 스트레스였다. 비겁하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그녀와 난 10살 넘게 차이가 나니 모든 잘못이 내게로 돌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왜 처음부터 그녀를 만나야 했을까. 왜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을 했을까.


그녀는 정신병을 가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을 이렇게 괴롭힐 리가 없다. 정상적인 사람은 연달아 전화를 10통씩 하지도 않고 커터칼로 손목을 긋지도 않는다.


나는 어떻게 한명의 인간이 파산하는지 알고 있다. 보통의 도덕성, 보통의 판단력, 보통의 무책임. 그 정도만 가져도 인간은 노래방으로, 룸살롱으로, 보도방으로 흘러가 조건만남과 스폰을 거쳐 꽃집에 안착하게 된다. 그녀는 아마 그 정도의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을 만나는 나도 그 정도의 인간이다. 결국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녀와 헤어지고 수많은 시간을 자책했다. 왜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고 사귀자고 말했는지 한심스러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어리석음은 곧 자기 파괴 본능으로 귀결되곤 한다. 뭘 잘 몰라서 노래방 아가씨가 됐고 뭘 잘 몰라서 인생을 방치했고 뭘 잘 몰라서 남자친구에게 자해 상처를 보여주며 협박했다.


결국 그 정도. 그런 인간. 나도 그런 인간이다. 더이상 살고 싶어지지가 않았고 구글 플레이 앱스토어에서 사망타임이라는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아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23년 233일 22시간 22분 21초라는 걸 확인하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 속에서 나는 하나 둘 셋을 셋고 손목에 묶은 아령이 풀리지 않도록 꼭 잡으며 그 안으로 그 속으로 점점 가라앉았다.


나는 죽었고 그녀는 살아있다. 그녀의 생이 나의 생만큼이나 길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소설가라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시인인지도 모른다. 신인지도 모른다. 신. 사람. 그리고 그녀.


절명.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죽는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집을 온통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거리에 다니는 고양이들을 끌어들여 방속에서 키우고 자라게 하고 먹이고 그런 사람들은 바깥에서는 멀쩡한 사회인으로 행세하며 살아갔다. 그 사람의 안을 보라고. 속을 보라고. 말이 아니라 마음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뇌가 아니라 심장을 뜯어봐야 한다.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건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우리 뇌 속에는 작은 우주가 들어있고 그 안에 은하수와 행성, 항성, 혜성, 달, 손목을 긋는 여자가 살고 있다. 손목을 긋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에 갔을 때 손목에서부터 팔꿈치 부분까지 칼자국이 남아있는 메이드가 전단지를 나눠주는 걸 봤다. 아키하바라였다. 소름이 끼쳤고 그녀의 멀쩡한 얼굴 뒤에 괴물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괴물을 바라보면 괴물도 널 바라볼 거야.


괴물에게 먹히기 싫으면 눈을 감으라고. 숨이 다하고 나는 물 속의 시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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