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씬이란? 서울은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다.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거미줄처럼 이어진 지하철을 통해 서울 구석구석을 오간다.
어떤 학자는 경기도와 의정부 인근을 합쳐 ‘대서울’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서울 주변의 위성 도시들이 서울 생활권과 밀접하게 연결된 점을 감안한 제안이다.
서울은 한국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때로는 한국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서울씬이란 ‘서울’이란 지명과 장소, 순간을 의미하는 ‘씬scene’을 합쳐서 만들어낸 조어이다.
서울에서 무너지고 사라지고, 또 생겨나는 공연장, 펍, 카페, 전시장, 영화관 등을 이 서울씬이라는 의미 구조 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쌈지스페이스 바람(클럽 쌤)
지금은 부도가 났지만 예전에 쌈지라는 패션 기업이 있었다. 이 기업은 문화 마케팅이라는 말이 낯설었던 90년대부터 문화를 활용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것이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인사동 쌈지길, 공연장 쌈지스페이스 바람이다.
쌈지는 ‘쌈넷’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예술가를 돕고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음반을 냈다. 쌈넷의 음반 발매 프로젝트는 인디 레이블로 발전했다.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의 숨은 고수를 통해 신인을 발굴하고 쌈넷을 통해 음반을 냈다.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은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인디 페스티벌로 사람들에게 인디 문화를 전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행사를 통해 일본의 유명한 팝펑크 밴드인 ‘엘르가든’이 내한했다.
쌈넷은 인터넷 방송국이기도 했다. 공연장 쌈지스페이스 바람에서 매주 펼쳐지는 라이브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하고 이를 동영상 클립으로 아카이브화했다.
2000년대 초반은 막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라서 조금 일렀던 기획이지만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이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공연장에는 카메라 4대를 운용할 수 있는 방송중계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었다.
쌈지스페이스 바람, 나중에 바뀐 이름으로는 라이브클럽 쌤은 홍대 인디 중에서도 가장 아방가르드한 음악들까지 수용했다. 인디라는 이름이 붙었던 밴드라면 한번쯤 쌈지스페이스를 거쳐가지 않은 밴드가 없을 정도였다.
후에 모기업인 쌈지가 부도가 난 후에 공연장이 정리 될 때 마지막 공연을 하기 위해 수많은 밴드들이 대관을 신청했다. 덕분에 마지막 공연 다음에 또 다른 마지막 공연이 잡히는 식으로 공연이 한동안 이어지기도 했다.
쌈지 스페이스 바람은 홍익대 앞에서도 구석진 곳에 위치해서 지하철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했다. 지하 주차장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가면 공연장이, 2층 위로는 갤러리와 미술가들의 레지던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쌈지 스페이스 바람이 특이했던 것은 다른 클럽들이 술을 파는 곳이어서 밴드들과 팬들의 아지트로서 기능했다면 이곳은 순수하게 공연만을 위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입장할 때마다 생수 1병을 들고 들어갔다. 2중 방음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무대와 2개의 기둥이었다. 기둥 앞쪽에는 카메라가 달려있어서 뒤쪽에 붙은 TV로 공연이 생중계됐다.
후에 상상마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런 시스템을 갖춘 공연장은 쌈지 스페이스 바람이 유일했다.
쌈지 스페이스 바람은 모던 록 클럽이었던 스팽글과도 인연이 깊다. 스팽글의 조성숙씨가 쌈지 스페이스 바람의 운영을 맡았던 덕분이다. 스팽글의 모던 록 밴드들이 이곳 무대에 그대로 섰고 노브레인이 중심이었던 펑크 레이블 ‘문화사기단’의 밴드들이 밤샘 공연을 하기도 했다.
쌈지가 주최했던 인디 페스티발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는 숨은 고수라는 신인 발굴 프로그램이 있었다. 해마다 벌어지는 이 컨테스트에 수많은 밴드들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특이한 것은 오디션에 서게 되는 수십 밴드의 공연을 관객을 채운 상태에서 진행했다는 것이다. 바로 쌈지스페이스에서 말이다. 오디션 겸 공연은 하루 종일 계속됐고 거의 일주일 내내 진행되곤 했다. 무료 공연이었기에 부담없이 볼 수 있었다.
고만고만한 밴드들 공연을 하루 종일 보다 보니 한여름 쌈지스페이스의 에어컨 바람은 잠을 불렀다. 비몽사몽 간에 공연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무대에 올라간 밴드가 멘트를 했다.
“1부 시작하겠습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곡이 시작하자마자 널브러져 있던 관객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노래를 마친 보컬은 또 멘트를 했다.
“1부 끝났습니다. 2부 시작하겠습니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밴드는 뭔가 다르다. 처음 보는 밴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연장의 사람들이 전부 무대 앞쪽으로 나가 집중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게 내가 장기하와 얼굴들을 처음 본 때였다. 시기는 2008년.
이후 장기하와 얼굴들은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숨은 고수로 출연했고 뉴스에 나왔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혹자는 이때에 한국 인디가 변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밴드 하나가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낸 것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이름을 쌈지스페이스 홈페이지에서 처음 봤을 때 그저그런 장난스러운 밴드 중 하나인 걸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라이브를 듣고나니 생각이 확 바뀌었다. 이 밴드는 진짜였다.
이후에 장기하와 얼굴들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을 라이브에서 받은 밴드는 십센치 정도다. 라이브를 듣고 나서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그대로 느껴지고, 흥분과 신기함과 유쾌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한국 문화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가는 순간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게 되었다.
1999년 첫번째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의 숨은 고수 중에는 밴드 넬이 있었다. 2001년에는 뜨거운 감자가, 2007년에는 국카스텐과 안녕바다가, 2013년에는 신현희와 김루트가 숨은 고수 중 하나로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을 거쳐간 밴드의 면면만 살펴봐도 얼마나 이 행사가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그저 신인이었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스타가 되었다.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과 쌈지 스페이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문화 주역을 키워내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쌈지가 사라진 후에는 EBS 스페이스 공감의 헬로루키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 후 CJ문화재단의 튠업, 각종 락 페스티벌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쌈지의 유산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밴드들을 위한 등용문이 상대적으로 넓어진 지금와서 돌아보면 오직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의 숨은 고수 밖에 오디션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은 홍대 인디씬이 막막하고 좁았다.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만연하게 된 시기를 거치면서 실력이 있는데 묻히는 경우는 없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잡은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냐가 더 관건인 시대가 되었다.
쌈지 스페이스는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이름이지만 족적만은 거대하게 남아있다. KT&G의 상상마당도 넓게 보면 쌈지 스페이스의 유산이다.
그리고 쌈지와 관련된 수많은 밴드들, 언니네 이발관, 모임별, 장기하와 얼굴들은 아직까지도 회자되곤 하는 밴드들이다. 쌈지가 없었다면 인디씬은 어땠을까. 분명히 더 삭막하고 좁은 동네에 불과했을 것이다. 한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젝트가 나라의 문화 지형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쌈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모든 건 결국 쌈지의 사장인 천호균씨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 사람의 상상력과 기획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들이 파생되어 나왔는지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비전을 갖추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쌈지스페이스 바람의 이름은 인디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