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뤄볼 주체는 공연을 만드는 기획자다. 이전의 인디씬이 공연장 주인의 주먹구구식 공연 기획으로 채워졌다면 서울씬의 기획자들은 재기발랄하고 의미도 함께 담는 공연을 주최했다. 이들은 떄로는 음반을 제작하기도 하고, 해외의 인디 밴드를 소개하기도 하며 다양한 기획 활동을 해왔다.
회기동 단편선, 박다함, 황경하
밴드 노 컨트롤의 멤버이자 기획자이기도 한 황경하가 기획한 공연 ‘홍대 아이유 결정전’은 이상한 컨셉의 공연이 많은 자립씬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이 기획이 성사되게 된 것은 홍대 아이유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여성 싱어송라이터인 ‘곽푸른하늘’이 자립 계열 공연에 많이 출연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사실 곽푸른하늘 양은 아이유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홍대 아이유란 별명이 붙은 것은 어린 나이에 혼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아이유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결정전이라는 것은 상대가 있는 컨테스트라는 것인데 누가 후보로 나왔을까. 그건 드랙 퀸 분장을 한 회기동 단편선이었다.
회기동 단편선의 여장은 웃음과 함께 그날 투표로 이루어진 홍대 아이유 결정전에서 우승을 거머쥐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회기동 단편선이란 뮤지션은 본명 박종윤으로 자립음악생산조합에서 운영위원을 맡으며 여러 공연을 기획하고, 자신이 직접 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홍대의 칼국수집 ‘두리반’의 철거 분쟁에서 생겨난 음악 생산자들의 협동 조합이다.
2010년 시작된 이 단체가 홍대 문화의 한 축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황경하, 회기동 단편선, 박다함과 같은 인디씬의 기획자들이 나타났다.
황경하
황경하 역시 자립음악생산조합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주로 철거 농성장과 관련된 공연을 많이 기획했다. 물론 홍대 아이유 결정전처럼 우습고 나사가 빠진 듯한 공연도 다수 기획한 경험이 있다. 황경하는 11팀의 음악가를 모아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사회 참여적 음반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선정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다.
황경하는 본래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대학생이 된 후 학생운동과는 무관하게 생활했다. 그랬던 그가 전역 후 복학해서 ‘회기동 단편선’과 같이 다니며 조금씩 소위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이 들기 시작했다. 회기동 단편선은 황경하의 학교 1년 선배라고 한다.
박다함
노이즈 음악가이자 현재는 잡다한 물건을 파는 우주만물의 직원, 헬리콥터 레코드를 통해 동아시아의 마이너한 음악을 소개하고 있는 박다함도 새롭게 나타난 인디씬의 기획자 중 한명이다. 그는 자신의 레이블을 통해 자신이 ‘체크’한 음악을 소개하는 한편, 공연장 로라이즈의 출자자 여섯명 중 한명으로 참여해 공연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 또한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일원으로서 51+ 페스티발을 같이 기획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박다함이 이 씬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공연 기획 중 한받=야마가트 트윅스터와 만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두리반에서 토요일마다 자립음악회를 기획한다는 소식을 듣고 밴드로서 참여한 것이 후일 자립음악생산조합의 결성으로까지 이어졌다.
회기동 단편선
이들과 함께 여러가지 기획에 참여했던 회기동 단편선은 ‘운동권’ 활동을 하면서 음악가로서도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백년’이라는 솔로 앨범을 낸 후 ‘단편선과 선원들’이라는 밴드 활동을 겸했다. 그의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은 1집 동물, 2집 뿔을 발매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2015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음반을 수상하며 ‘단편선과 선원들’의 커리어는 정점을 찍는다. 2017년 밴드를 접고 다른 자립음악생산조합의 구성원들처럼 각자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을 움직였던 3명의 기획자 중 황경하는 현재 서울 민예총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운동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대학생이 운동 깊숙히 들어온 셈이다. 박다함은 우주만물에서 일하며 때때로 노이즈 음악으로 현대 미술에 참여하는 등 개인적인 활동을 지속해나가고 있다.
회기동 단편선은 홍우주사회적 협동조합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서울생활문화센터 서교 센터장을 역임하고 있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여장을 할 때 유용했던 긴 머리는 싹둑 잘라버렸다. 현재 그는 오소리 웍스라는 프로덕션을 차려 친한 뮤지션들의 음반을 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음반, 포크 노래를 수상한 천용성이 그가 프로듀싱하는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그는 아직도 기획자로서 활동하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사회 참여적인 색깔을 드러내지는 않는 편이다. 그가 프로듀싱하는 음악에는 다소 ‘자립스러운’ 색채가 섞여있기는 하지만 노래만 놓고 보면 일반적인 가요에 가깝다.
어떤이는 회기동 단편선의 정체성에는 개인적인 인간 ‘박종윤’으로서의 정체성과 음악가이자 활동가인 ‘회기동 단편선’으로서의 정체성이 혼재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긴머리에 맨발로 기타를 치며 활동할 때는 누구보다 앞에 서서 돌진해나가는 저력을 갖고 있었다. 인간 ‘박종윤’으로서는 서울에 위치한 중상위권 대학을 다닌 평범한 회사원이기도 하다.
그가 여러가지 활동을 동시에 해나가는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의 활동을 그만 둔 후로도 개인적으로나 또 다른 집단의 일원으로서 ‘인디스러운’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가 사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또 대중 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회기동 단편선이 자신만의 대안, 우리들만의 대안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록이 쇠퇴했다. 포크는 인기 없다. 음악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개중에는 불평도 있고 폄하도 있다. 단순히 현 상황에 대한 불만만을 내뱉는다면 소비자의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작으나마, 조잡하게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해보면 어떨까. 음악에 재능이 없다면 공연을 기획해보면 어떨까.
처음에는 아무도 없던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공연장을 만들어냈던 것이 자립음악생산조합, 나아가 한국 홍대 인디씬, 서울씬의 역사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 일어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좋아해서, 흥미로워서라는 개인적인 이유로 음악을 시작했고, 공연을 봤고, 공연장을 운영했다.
인디란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란 인터넷 상의 우스개 소리가 있다. 물론 일견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디는 대중음악의 ‘2군’이 아니다. 유명해지기 위해서 애면글면하는 지망생들의 집단이 아니란 말이다.
인디는 삶의 방식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삶을 살 때 그들을 인디라고 부를 수 있다. 회기동 단편선, 박다함, 황경하는 그런 삶을 견지해나갔고, 지금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인디씬의 기획자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