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어떻게 가게가 되는가?
남미의 소설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백년의 고독>을 보면, 울창한 숲에 고립된 마을 마꼰도에 떠돌이 집시 무리가 찾아 든다. 증기기관차가 막 달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때는 19세기 중반 쯤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원시림의 미개인처럼 살아가던 마꼰도 마을 사람들은 집시 무리가 온갖 사기술을 섞어 신비의 물건이라 내 놓은 자석을 보고 깜짝 놀란다. 어떤 쇠붙이든 끌어당기는 신비한 힘을 가진 이 물건을 보고 놀란 한 남자는 자신의 집에 있는 금화를 주고 그 자석 뭉치를 사들인다. 그는 이 신비로운 물건이 금이나 은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연금술에 빠져든 남자는 가산을 몽땅 탕진하고 나서야 자석으로는 금을 만들 수 없고 기껏해야 땅속에 묻혀 있는 녹슨 쇠붙이를 찾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구와 기계, 물질과 에너지를 서로 교환 가능한 시스템으로 만들어내면서 근대 과학이 출현하였다. 가장 초보적인 도구인 도끼와 칼은 그 기본 모양이 쐐기 형태이다. 날카로운 예각의 가는 끝부분에 힘이 집중되도록 만든 쐐기는 오늘날까지 최첨단 기술에도 활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지레, 도르래, 바퀴, 톱니 등과 같이 발명된 지 수천 년이 넘은 기술들도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다. 중력과 무게, 힘을 이용하는 도구에 이 원시적인 기술이 사용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보다 현대적인 기술은 전기와 자기, 이른바 전자기력을 활용하면서 출현했다.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와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 전기와 자기의 성질이 같다는 것을 밝힌 후, 이 힘들이 다시 빛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아인슈타인(1879-1955)은 전자기력과 빛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까지 밝혔다.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씹고, 뜯고, 맛보는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전환된다. 평균 체구를 가진 성인 한 사람의 몸은 대형 수소 폭탄 30개에 맞먹는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 물질과 에너지가 같다는 말은 힘과 그 힘이 존재하는 공간이 서로 같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시공간(spacetime)이라는 말로 풀이한다. 강력한 힘은 공간을 구부리고 그 구부러진 공간 속에서 시간은 느려지거나 빨라지게 된다.
이쯤 되면 자석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는 미개인의 주장이 황당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4차원의 세계나 평행 우주도 그런 대로 들어줄 만하다. SF 영화에도 막 나오고 그러니까. 그런데 수능 국어 시험 과학 지문에 가끔 등장해 우리를 골탕 먹이는 양자 역학은, 물질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우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기절초풍 할 주장을 서슴 없이 내놓고 있다. 그들 싸이언티스트들이 어디까지 갈 모양인지 잘 모르겠다. 미래의 최첨단 과학은 아마도 불교의 세계관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삼라만상이 다 무요, 공이라 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언젠가 저런 소박한 과학이 그리울 때가 올 것이다. 과학기술로 허리 통증을 완화하고 골다공증을 예방하던 알피지 오메가쓰리의 시대가, 과학을 가게에서 팔던 그 순수의 시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