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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글을 쓰겠다는 명목으로 키보드를 주문하였고, 퇴근 직전 배송을 받았다. 미니 키보드라고는 하지만 토트백에 들어가지 않아 대충 박스에 넣어 손에 든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 생일을 맞이한 가족의 선물을 살 참이었다. 미리 생각해 둔 패브릭 벨트가 있었고 곧장 그 브랜드가 위치한 6층으로 향했다.
매장에서는 깐깐만 말투의 남자와 다부져 보이는 여성이 옆 매장의 커다란 쇼핑백 네개를 자랑스럽게 테이블에 올려둔 채 드라이빙 슈즈를 고르고 있었다. "염소 가죽은 너무 빨리 닳지 않나?" 남자가 말했다. "어머, 고트가 제일 튼튼해요 고객님, 지금 착용하신 제품은 막상 신어보시면 안 닳는다고 느끼실 거예요. 이 컬러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점원의 과장된 말투가 이어졌고 이를 지켜보던 여성은 호쾌하게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세개 할게요" 라고 선언했다. 나는 짐짓 남의 대화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척 패브릭 벨트를 가져와 결제를 했다. 저 드라이빙 슈즈를 세 개 산 돈으로, 이 벨트는 열개 쯤 더 살 수 있겠지. 말끔하게 포장된 쇼핑백을 건네받고 주섬주섬 키보드 상자를 챙기는데 점원이 다정하게 묻는다. "쇼핑백 하나 더 드릴까요?" "네, 그래주세요. 고마워요" 매장을 나오는 내 손에는 그 브랜드의 로고가 아로새겨진 형광 주황색의 쇼핑백이 각기 다른 사이즈로 두 개 들려있었다.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향수 부티크의 시향지를 받았다. 코에 가져가는 순간 저항하기 힘들었다. 나에게 시향지를 건내준 남자에게 물었다. "이 향 이름이 뭐죠?" "가드니아 입니다." 남자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 타는 곳 근처에 매장이 있습니다." "네, 고마워요" 나는 매장에 들어가자 마자 처음 눈이 마주친 점원에게 '가드니아' 향수의 시향을 요청하였다. 같은 레이블의 향수 두 개 정도를 더 권하는 점원을 향해 지루하다는 듯 '가드니아로 할게요' 라고 말했다. 이내 점원은 80밀리리터 용량을 살 것인지, 50밀리리터 용량을 살 것인지 물었다. "80미리는 너무 크네요. 50미리로 주세요" "주차 하셨나요?" "아니요, 괜찮아요". 점원은 "휴대하시기에는 50미리가 낫죠 아무래도" 라는 말을 굳이 덧붙였다. 내 손에는 또 다른 주황색의 쇼핑백이 하나 더 들리게 되었다.
노트북 가방에 핸드백, 쇼핑백까지 꽤 많은 짐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소비란 그런 것이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는 그 순간의 쾌락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는, 그렇게 결제한 물건을 들고 귀가하는 동안 증명된다, 라고 생각하며 3호선에 올라타, 빈 자리를 찾아 빠르게 앉았다. 내 앞에는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여성을 '차장님'으로 칭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회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었는데 목에는 '조선일보'라는 글자가 선명한 출입증이 걸려 있었다. 구두와 벨트의 색상까지 완벽하게 맞춘 것으로 보아 행색에 보통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닐터, 이 사람은 부러 출입증을 목에 매단 채 퇴근하였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하긴, 자랑스럽지 않을 것은 또 뭐람'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들을 유심히 쳐다보던 그의 눈길과 마주쳤다. 남자가 내 손의 쇼핑백들이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심판한 듯한 기분이, 괜히 든 것 만은 아닐 것이다.
여덟 정류장을 지나 남자의 '차장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탔다. 떡볶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 저녁도 못먹었네. 몇 개의 엘리베이터를 거쳐 집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며 발견했다. 내 목에도 알록달록한 회사 로고가 새겨진 출입증이 달랑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은 십 이삼만원 하는 기계식 키보드로 작성한 첫번째 글이다. 향수는 아직 쇼핑백에서 꺼내 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