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Rid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ㅇㅇ Jan 10. 2016

가장 따뜻한 계절, 가을

서울 택시_드림타운

"안녕하세요"

승객이 탑승하자 마자 먼저 인사를 건내는 택시기사는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행선지를 말해도 대답하지 않는 기사, 더러운 차 안, 퀘퀘한 냄새와 잦은 브레이크, 신용카드를 내밀 때의 살기어린 얼굴, 정치, 경제에 대한 엉성한 견해와 특정인, 특정 집단에 대한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분노 표출. 타야 할 이유보다 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지만 또 아쉬운 대로 타게 되는 것이 바로 택시, 가 아닐까, 짧은 순간의 맹렬한 망설임 끝에 오늘도 <빈차> 등을 확인하고 뒷쪽 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곧장 들려온 것이 낮고 단정한 음색의 "안녕하세요" 였다. 


 "예, 안녕하세요. 관악 드림타운 쪽으로 가주시겠어요?" 

 "그러겠습니다." 

 30분은 내리 가야 하는 행선지였다. 비도 오고 있었다. 차내는 이내 조용해졌고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그것을 무심하게 닦아내는 와이퍼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친구들에게 택시를 탔노라 전하기 위해 메신저 앱을 켰다. 차내에서 조용히 크레믈린의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도입부였다. 

 [야, 택시에서 라흐피협2번 나옴] 

 [오 아저씨 클에펨 트심?] 

 [그런듯] 

 [택시에서 클에펨 나오면 은근히 기분좋던데] 

 [그르게 말야. 라흐피협2번 오랜만이다잉] 

 [암튼 어서 와] 

 [하라써 재촉좀 하지 마] 

채팅내용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데 다시 예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악이 괜찮으십니까?"


 망설여졌다. 어디까지 나를 드러내야 할까. 저 사실은 클래식 오타쿠입니다, 지금은 클음을 들으며 친해진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중이고요, 다음주에는 오스모 벤스케와 서울시향의 <베토벤 교향곡 5번> 들으러 갈 예정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스무살 때 굉장히 즐겨들었지요, 하지만 나이 먹으면서 안 찾아 들은지 꽤 되었네요,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는 이 협주곡이 항상 생각나죠, 제 어린 시절이 음각된 곡입니다, 대신 조용히 "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시나봐요." 라고, 대답했다.


 "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는요, 책읽고 음악듣고 하면서 사유하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요, 어떤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클래식 음악을 듣는 동안은, 조용히 생각을 하고 또 내 생각에 대해서 정리를 하게 되니까, 참 좋은것 같더라고요"


 사유, 근본, 원인. 평범한 단어는 아니었다. 적어도 택시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들이 아닌가.

 "사용하시는 어휘들이 굉장히 고급스러우신데요, 하하. 라흐마니노프가 비오는 날 참 잘 어울리죠" 

 "음악을 즐겨 들으시나보네요. 이 곡도 아름답지만,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베토벤의 황제 라는 곡이 있는데 정말로 아름답지요" 


채팅방에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헐 아저씨가 베느님 소환하심] 

 [헐???클덕이신가]

 [베피협5번 찬양하심 베교신자 추가] 

 [베교 부흥회에 베교신자의 택시를 타다니] 

동시에 나는 아저씨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황제, 정말 좋죠. 서울시향과 김선욱이 녹음한 것 들어보셨나요? 저 조성진의 황제 협연도 실황으로 지켜봤었지요, 몇 달 뒤 백건우 선생님이 발레리 게르기에프의 뮌헨 필하모닉과 연주하실 예정인데 정말 기대되죠, 황제는 피아노 협주곡의 황제같은 존재예요. 황제로 수많은 순간을 치유받았답니다, 를 삼키고, 

"그렇죠, 2악장이 정말 아름답죠"

라고 말했다. 


 1악장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말을 멈추었다. 조용히 감상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듣는 다면 누구나, 숨죽일 수밖에 없는 프레이즈로 가득 찬 곡이다. 변화무쌍한 멜로디 속에서 피아노는 때로는 거칠게,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조용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새하얀 눈밭을 한줄기 햇살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씩 천천히 걸어가는 듯한 2악장은 누가 들어도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낭만 그 자체이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과 서러움과 희망과 환희와 절망이 모두 존재하는, 감정으로 가득찬 음악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 곡처럼 많이 웃고, 많이 울던 이십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방에는 같이 만들어 먹을 주먹밥 재료가 있었고, 우리는 와인을 곁들여 마실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아 추억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볼 거고, 오늘 도착했다는 조성진의 쇼팽 콩쿨 입상 기념 cd를 틀어놓고 함께 들을 것이다.  늦가을은 노을과 함께 드리워져 있었고 비에 젖은 낙엽이 소복이 깔린 산길을 따라 택시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 택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