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좀 해본 사람이라면 ‘사이버펑크 드립’을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고층빌딩을 배경으로 네온사인이 가득한 한국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이를 별로라고 하지만, 막상 해외(특히 서구권) 네티즌들은 ‘사이버펑크스럽다’며 환호하는 모습을 두고 “이것이 힙한민국의 사이버펑크다”라고 하는 등이다. 실제로 한국, 특히 서울은 해외 사이버펑크 팬들 사이에서 ‘네오 서울(Neo Seoul)’, ‘사이버펑크 서울(Cyberpunk Seoul)’ 등의 별칭으로 유명하다. 레딧(Reddit) 등의 해외 커뮤니티나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서 Cyberpunk Seoul을 검색하면 <그림1>처럼 수많은 인기 게시물이 뜰 정도이다.
필자는 서울에서 나고 서울 근방에서 20+N년을 자랐는데, 서울을 밥 먹듯이 들락날락하는 입장에서 처음에는 이러한 해외 유저들의 반응이 의아하기도 하였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겐 의외의 요소가 어필을 하는 구나 싶었다. 아마 우리에겐 이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질감을 못 느끼는 것일테다. 그러던 중 필자는 작년에 5개월 정도 유럽에서 거주하다 돌아올 일이 있었고, 한국으로 반년만에 귀국한 그날에 바로 알아챘다. “이곳은 사이버펑크의 나라가 맞다!” <그림2>, <그림3>은 서울의 흔한 풍경임과 동시에, 이른바 ‘사이버펑크스럽다’고 느껴지는 풍경이다. 또 <그림 4>는 2020년 발매 예정 게임인 <사이버펑크 2077>에서 사이버펑크 사진 콘테스트를 열었을 때 1위를 차지한 사진인데, 배경이 서울이다.
위의 이미지들은 사이버펑크가 대략 어떠한 시각적 느낌을 의미하는 지를 알려준다. 본문에서는 사이버펑크의 기원과 특징 다루고, 유사한 개념들과 비교한 후에, 장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살펴본다.
짙은 스모그로 더욱 어둡게 느껴지는 밤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대도시에 마천루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주인공은 우비를 쓰고 골목으로 향한다. 좁은 골목엔 수많은 네온사인간판과 사이보그와 가난한 자들이 화려하면서도 지저분하게 얽혀 있다. 주인공은 사람들 사이를 간신히 뚫고 걸음을 재촉한다. 뒤 편으로 보이는 거대기업의 빌딩은 하찮은 우리를 관망하듯 저 멀리에 우뚝 서 있다.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많은 사이버펑크 작품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을 각색하여 영화화 한 작품으로, 2019년의 LA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미래도시 모습은 CG가 아닌 미니어쳐 등을 통해 직접 촬영한 것이다. 웅장한 건물이나 모형, 세트 등은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감독 리들리 스콧은 질감과 색채가 맞지 않는 모형에 연기를 깔고 비를 뿌려 빛의 파장에 강조를 두었다.
사이버펑크는 SF의 하위 장르 중 하나로, 1984년 출간한 윌리엄 깁슨의 장편 SF 소설 <뉴로맨서>로부터 탄생한 장르이다. 그 어원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인공두뇌학)와 펑크(Punk, 좁게는 70년대식 반항적 패션 경향을 의미한다)의 합성어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는 Cyberpunk를 “컴퓨터 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억압적인 사회의 무법적인 서브컬처를 기반으로 하는 SF 장르 (A genre of science fiction set in a lawless subculture of an oppressive society dominated by computer technology)”라 정의한다. 즉, 사이버펑크는 컴퓨터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지나치게 통제력을 가지게 되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이곳에서 하위층의 문화(무법적인 서브컬처)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서브컬처는 비주류 문화이고 그 비주류인 하위층은 해커, 범죄자, 갱, 혁명가 등 그 시대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들을 포함한다.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를 정의한 것은 1984년의 <뉴로맨서>지만, 그보다 앞서 1982년 작 영화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디즈니 사의 <트론>이 장르의 시각적 이미지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기존의 SF 작품에서는 미래 사회상을 묘사할 때 과학기술의 발전 덕에 도시 전체가 찬란하고 깔끔한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나 혹은 아예 핵전쟁 등으로 인해 인류 문명이 멸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미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는 네온사인이 가득하고 아시아 풍인 인구 과밀화 도시의 모습을 새로 제시했고, <트론>은 다가올 컴퓨터 세상과 사이버스페이스를 시각화 했다.
"High Tech, Low Life."
미국의 TRPG 시스템 ‘겁스’ 중 겁스 사이버펑크의 캐치 카피이다. 최첨단과학과 대비해 삶은 피폐해지는 사이버펑크 시대상을 설명하기에 매우 적절한 문장이다. 과학기술은 발달되지만 이것의 부작용으로 사회적 병폐, 부조리, 계급 갈등 등이 발생하는 것은 단골 소재이다. 주로 후기 고도 정보 기술 사회를 디스토피아로 표현하고, 주인공은 이에 반발과 저항의식을 갖고 있다. 초창기 사이버펑크 성향의 작품에선 인체의 능력이나 의식을 기계적으로/생명공학적으로 확장이 가능한 세계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이들을 지배하는 더 큰 구성체(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상황을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이버펑크 영화 중 1999년 작 <매트릭스>에서도 유사한 설정을 차용했다.
사이버펑크가 특히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198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80년대는 일반 가정에서도 컴퓨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컴퓨터가 점점 발전하고, 그런 컴퓨터와 접촉하는 사람도 점점 많아진다면 결국 궁금한 것은 정보 통신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하여 인간을 어떻게 바꿔 놓는 지다. 심지어는 컴퓨터가 발전하여 인간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따라서 사이버펑크에서는 ‘네트워크로 인한 감각의 확장과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인간성의 결손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의 정체성’, 혹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과 그들에 대한 철학적 논점’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사이버펑크 이전에 6, 70년대의 ‘뉴웨이브 SF’가 외우주보다 내우주(인간의 내면심리) 탐구에 관심을 가진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복제인간 ‘레플리칸트’를 통해 인간이 창조한 인간과, 본래 존재하는 인간의 차이에 질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서 가상과 실제의 구별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술 발전과 그에 따라 흔들리는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먼 미래가 아닌 ‘근미래’를 다루는 것도 특징이다. 사이버펑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비판하는 풍자소설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가까운 미래를 어둡게 묘사함으로써 경각심을 주는 경향이 강하다.
TRPG “사이버펑크”의 원작자 마이크 폰드스미스는 사이버펑크의 핵심을 기술이 아닌 ‘느낌’이라 말했다. “핵심은 느낌이죠. 어둡고, 불쾌하고, 비에 젖은 거리의 느낌과 락&롤, 방황, 절망과 위험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 ‘느낌’을 내는 대표적인 사이버펑크의 시각 이미지들은 다음과 같다.
대도시권에 빼곡한 마천루들: 도시는 빈부격차가 두드러지게 디자인한다. 슬럼가 골목에 이국적인 언어로 장식된 네온사인이 가득한 것도 필수 요소이다.
어둡고 비 오는 날씨
사이버스페이스: <뉴로맨서>에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저자 깁슨이 만든 합성어로 모든 생활을 영위하는 사이버 공간을 의미한다.
아케이드 게임
한자문화권 언어: 슬럼가의 네온사인 간판에 한자문화권 특유의 전각문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8, 90년대에는 중국어와 일본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2000년대부터는 한국어의 사용 빈도도 늘어났다.
동양풍 광고: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으로 고층빌딩 전체에 조사되는 동양인 광고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미래지향적 디자인: 주로 미니멀리즘 형식이거나 육각형 기반의 기하학적 디자인이다.
현재보다 훨씬 진보된 과학기술: 무기, 바디슈트, 인공지능 로봇, 교통수단 등
심각한 환경 오염: 외출할 때 방독면을 쓰고 외출하거나, 아예 접근금지 구역이 존재하는 것도 흔한 클리셰다.
‘막장’ 사회: 마약이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반인륜적인 초거대기업이 존재하며, 성관념이 퇴폐적이다.
배경음악: 배경음악은 주로 일렉트로니카, 힙합 장르 곡을 사용한다.
한자문화권 언어가 적힌 네온사인, 거리의 동양인들, 빌딩에 상영되는 동양풍 광고 등 <블레이드 러너>를 비롯해 그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이버펑크 작품들은 한국, 중국, 홍콩, 일본 등의 동아시아 문화에 시대적 모티브를 얻은 경우가 많다. 특히 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는 사이버펑크와 관련이 깊다. 당시 일본은 엔저를 기반으로 한 초호황기로 미국의 경제적 지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동시에 소니 워크맨, 닌텐도 게임 등으로 첨단 기술문명을 지닌 국가라는 이미지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가파른 성장에 당혹감을 느꼈고 근미래에 일본이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공포가 만연했다. 이러한 당시 시대 배경에 영향을 받아 초창기 사이버펑크에서는 최고 강대국은 일본이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신흥 강대국들의 문화가 보편적인 근미래를 묘사했다.
물론 서구권의 작품에서 묘사하는 ‘동양적 요소들’은 필자를 비롯한 동아시아인의 입장에서 보기에 여러 나라의 문화들이 괴랄하게 ‘짬뽕’되어 굉장히 이질적인 무언가가 된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당시 일본의 시대적 배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이버펑크의 특성 상 ‘와패니즘(일본 문화에 심취한 서양인 문화를 일컫는 신조어)’의 느낌이 나는 요소들도 다수 존재한다. 결국 이런 점에서 사이버펑크가 차용하는 동양적 이미지들이 순수하게 ‘타문화에서 영감을 얻고 예술적으로 재창조’ 한 것인지, 아니면 ‘서양 입장에서 동양을 타자화 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이 반영’된 것인지는 계속 논란의 여지로 남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사이버펑크는 High Tech, Low Life로 대변되는 암울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세워진 장르이다. 이때 우리가 ‘암울한 미래상’이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단어가 있으니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그것이다. 모두 어두운 미래를 그린다는 점에선 동일하나 (정신이 쉽게 피폐해진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나), SF의 세부 장르, 소재, 혹은 세계관으로서 이들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디스토피아는 역(逆)유토피아, 즉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이다. 그리고 그런 암흑세계를 묘사하고 비판하는 문학작품이자 사상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억압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로, 그리스어로 나쁜(dys) 장소(topos)를 의미한다. 디스토피아에서 말하는 암흑세계는 주로 전체주의 정부에 의해 억압받고 통제 받는 공동체 또는 사회이다. SF 작품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빈번히 차용하는데,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친의 <우리들>이 디스토피아 소설의 3대 고전으로 불린다. 다만 디스토피아 용어 자체는 넓은 의미로 부정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공동체와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고 그 소재가 반드시 과학소설의 맥락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므로, 디스토피아는 SF의 범주 밖에서 SF와 교집합을 갖는 관계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물)는 SF의 하위장르로, 어떤 급작스러운 계기로 인해 인류 문명이 멸망하는 과정 혹은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다룬다. ‘아포칼립스’는 계시, 폭로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룹시스에서 유래하여 아마게돈이나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SF 장르에서 이 아포칼립스를 세계종말을 일컫는 단어로 채택해 사용하고 있고 따라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세계종말 이후의 세계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으로 ‘좀비물’과 ‘바이러스물’ 등을 이야기하는데, 이들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하위 분류 – 좀비 아포칼립스,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에일리언 아포칼립스, 전염병 아포칼립스, EMP 아포칼립스 – 에 포함된다. 이 중 이름이 생소할 수 있는 EMP 아포칼립스는 전자기 펄스를 이용한 EMP 효과로 인해 인류 문명이 모든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세계를 묘사한다.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자칫 혼동하기 쉽지만, 둘은 인류 문명이 어떤 상황인지를 기준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디스토피아는 인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하여 지나치게 통제력이 강한 시대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이 붕괴하여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된 시대이다. 또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은 그 어원 상 암울한 미래와 그에 대한 비판 및 풍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경우 꼭 부정적 분위기를 가질 필요는 없으며, 문명 붕괴 이후의 생존 일기, 성장물 등 희망적인 어조를 취하는 것도 주제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이러한 구분되는 서사적 특징이 있다. 다만 전쟁이나 바이러스 등의 영향으로 인해 전체주의 정부가 등장하는 시놉시스처럼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종종 결합한다.
이렇게 개념들을 나누었을 때 사이버펑크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SF 하위 장르’로 분류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는 사이버펑크를 컴퓨터 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억압적인 사회를 다루는 SF 장르라고 정의한다. 사이버펑크는 기술에 의한 통제와 억압, 그리고 그로 인한 폐해가 강조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관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덧붙여 ‘무법적인 서브컬처’, 즉 무법적인 비주류 하위층 문화를 조명한다는 차이점이 존재할 뿐이다.
사이버펑크는 1960년대의 뉴웨이브 운동과 1970년대의 하드 SF의 융합을 기반으로 1980년대에 탄생하였다. 이후 1990년대에 다양한 포스트-사이버펑크 작품들이 제작되면서 (초기 사이버펑크의 의미는 다소 퇴색되었을지라도) 본격적으로 장르물로서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에는 그 인기가 시들고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는 사어(死語)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사이버펑크에서 가장 관심있게 지켜보고 또 고대하던 21세기지만, 막상 21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보니 21세기는 20세기 말 현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사이버펑크에서 핵심적인 기술인 사이버스페이스(사이버 공간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하는 삶)가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점이 팬들의 기대를 꺾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 과거 사이버펑크 작품들에서 다뤘던 기술들이 유사하게 현실화되는 경우(알파고, 구글 글래스 등)가 나타나고 미래 기술에 대한 대중 논의가 활발해지며 사이버펑크를 비롯한 SF 장르 전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과거의 고전 사이버펑크가 21세기 초를 상상했다면 이제는 2040~50년대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사이버펑크 작품이 제작되고 있기도 하다. 이중에는 전세계적 뉴트로 트렌드와 맞물려 다시 1980년대 사이버펑크의 분위기로 회귀하는 ‘레트로 사이버펑크’를 지향하는 작품도 다수이다. 결과적으로 장르, 더 나아가서 유행 사조로서의 사이버펑크는 다시금 부흥을 맞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까? 2010~20년대를 그린 포스트-사이버펑크를 넘어서, 2050년대를 그릴 포스트-포스트-사이버펑크를 짐작해 볼 때이다. 물론 SF라는 장르적 특성 상 앞으로의 기술 발전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으며 진화해 갈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주된 변화로 ‘일부분이 상위 장르인 SF로 흡수’, 그리고 ‘주제의식의 변주’를 들 수 있다.
미래 기술의 종류는 상식이 되고, 미래 사회의 이미지는 대중적으로 연상되는 시대가 왔다. 현대인의 대다수가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가상현실, 클라우드 등의 미래 기술 키워드를 한번이라도 들어봤을 것이다. 그 자세한 기술적 원리와 의미는 모르더라도, 기술이 가지는 대략의 ‘이미지’는 공유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버펑크의 외연은 상위 장르인 SF의 어딘가로 흡수된다. 말을 사이버펑크라고 붙이더라도 흔하게 떠올리는 미래 사회의 모습과 차별점이 없는 부분들은 관람자의 입장에서 이미 기존에 갖고 있던 SF의 넓은 이미지와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사이버펑크의 기원, 본질, 혹은 오랜 클리셰에 해당하는 요소들 – 어두운 배경, 빼곡한 고층빌딩, 네온사인, 아케이드 게임, 피폐한 일상 등 – 은 살아남아 더욱 그 입지를 굳건히 할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미래상과는 무언가 좀 다른, 고전 사이버펑크의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 장르의 경계선을 더 선명히 긋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포스트-포스트-사이버펑크는 레트로 사이버펑크로의 확실한 회귀다. 더 정확히는 시각 이미지 측면에서의 회귀다. 빨리 끝나진 않을 뉴트로 트렌드에 힘입어 레트로는 소위 더 ‘먹히는’ 이미지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주제의식 측면에선 기존과는 다르게 변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사이버펑크가 디스토피아의 문법을 따른다고 할 때의 일반적인 사회상은 극도로 발달된 기술문명이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사회이다. 디스토피아를 조지 오웰의 ‘공포에 의해 통제되는 전체주의’와 올더스 헉슬리의 ‘말초적 자극을 통한 우민화’ 관점으로 나눈다고 할 때(<그림 6>), 전형적인 디스토피아물은 오웰의 전체주의 사회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포스트-포스트-사이버펑크는 오웰과 헉슬리의 미래상이 극단적으로 혼합된 사회를 보여줄 것이다.
우선 AI, 빅데이터 등의 기술이 향후 몇 십년을 견인할 키워드로 꼽히고 있는데, 기술 발전이 실제로는 어느정도 수준인지 와는 별개로 인간은 자연스레 이 단어로부터 안개 같은 경외심 혹은 두려움을 안겨주는, 마치 ‘빅 브라더’와 같은 존재를 연상한다. 암울한 미래상을 논할 때 인간을 뛰어넘은 인공지능과 방대한 데이터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당연히 인간이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어 통제 하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시에 인간은 기술 그 자체만이 아니라, 기술로 인해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을 두려워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윤리의식의 발달 속도를 뛰어넘으면서 기술이 주는 혜택은 말초적 자극으로 전락한다. 말초적 자극에만 심취한 인간은 스스로 인간성을 유기하고 폭주한다. 근미래까지 가지 않아도, 가령 현대인은 이미 ‘악플’과 ‘디지털 성범죄’ 등 끔찍한 사례를 여럿 목격했다. 자극은 무분별하게 펼쳐져 있고, 헉슬리가 경고한 우민화는 언제 스며들지 모른다.
결국 이러한 두 가지 두려움은 포스트-포스트-사이버펑크가 그릴 새로운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에도 투영된다. 즉, 이곳은 인간이 통제 당하면서 동시에 방임 당하는 사회다.
"오웰은 책을 금지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지만, 헉슬리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 금지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오웰은 정보를 차단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지만, 헉슬리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져,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중략)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한다 생각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망하게 하리라 생각했다."
앞서 사이버펑크의 대표작인 <블레이드 러너>가 2019년의 LA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필자가 글을 쓰는 2020년 7월 현재, 2019년은 이미 1년도 더 지난 과거가 되었지만 다행히 영화 속 암울한 사회는 아직 현실화가 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점점 유사해지는 측면은 있다. 특히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그것을 더욱 체감한다. 원래도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었지만,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그 발전 속도가 강제로 앞당겨진 느낌이다. 모든 사람이 밖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고, 많은 업무는 ‘언택트’로 이루어진다. 얼핏 보면 사이버펑크가 도래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다. 그러나 필자가 닮은 모습이 있을지언정 도래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기술이 발전해도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내는 감각 자체는 아직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이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지만 그들이 일상을 사는 감각이 180도 변한 것은 아니다. 매체가 스마트폰으로 옮겨갔을 뿐 여전히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할 일을 하고, 여가시간을 갖고, 아끼는 사람들과 소통한다. 필자는 사회에서 심각한 수준으로 인간성이 결여되는 현상이 보일 때 이것을 사이버펑크와 같은 암울한 미래상이 도래할 징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현재의 우리는 적당히 암울하고 적당히 희망적인 세상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71기 김지우
- 이 글은 Google Play 스토어에서 무료로 열람하실 수 있는 도서 <Feelm: 1권>(서강영화공동체, 2020)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