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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코치 Feb 09. 2020

자기발견 DAY 9_손바닥 자서전 특강 마무리

다시 쓰고 싶은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한달자기발견의 첫번째 책, 손바닥 자서전 특강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책을 다 읽고나서야 손바닥 자서전이라는 책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냥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라서 손바닥이라고 표현한 줄 알았는데, 그 이유보다 길이가 짧은 글이자 작은 주제의 이야기를 의미한다는 이유가 더 마음에 든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서전을 쓸 때 가장 쉽게 하는 실수가 자꾸 큰 이야기를 하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맞다. 그동안 나는 자꾸 큰 이야기를 하려했다. 생각이 많아 그 생각을 정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다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작년에 참석했던 글쓰기모임에서 누군가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며 구체적이지 않은 문장은 게으른 문장이라고 말했다. 상황과 일어난 일을 직접적으로 쓰는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독자가 그 상황에 빠져들 수 있도록 구체적 묘사를 해주라는 뜻이다. 나는 게으른 거였다. 몸뚱이만 게으른줄 알았는데 머리도 게으르니 이걸 어쩌나...반성 중이다.


오늘은 그동안 썼던 글 중 한개를 골라 퇴고하는 미션이다. 



"다음 학기 등록금 낼 돈이 없구나. 미안하다"


그때부터 취업하기 전까지 알바인생이 시작됐다. 전단지, 호프집, PC방, 이벤트행사도우미, 전시공간설치, 백화점판매직, 파주출판공장책정리, 웨딩홀뷔페, 호텔연회장, 초고속인터넷 아웃바운딩, LG텔레콤 휴대폰판매 등등 난 기억력이 좋은편이 아닌데 알바만큼은 어디서 무슨일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가장 오래했던 일은 공사장 노가다였다. 일당 잡부부터 미장이보조, 덕트시공보조 등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인력사무소로 나갔다. 그러다보니 22살 한창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에 휴대폰 전화목록엔 죄다 아저씨들 뿐이었다. 아저씨들과 잘지내면 일이 잘들어와서 좋았다. 신도림 이편한세상 샤시시공, 목동 실로암병원 덕트시공, 용산역 아이파크몰 등 서울 곳곳을 지나다보면 아 이거 내가 지었는데(뭐 쪼금 날랐던거 가지고 다 지었다고 말한다) 하며 새삼 추억돋는다.


어릴 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관심도 없었고 굳이 알필요도 없었다. 나에게 로버트 기요사키의 책처럼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부자아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난 그냥 친구들이랑 노는걸 좋아했던 철부지 꼬마였고, 다들 공부하니까 하고 다들 좋은 학교가고 좋은 직장에 가는게 당연한 것처럼 말하니까 그냥 그런줄 알았다. 왜 그래야하는지는 모른채.


공부를 왜 잘해야하는지 모르니까 성적이 좋을리 없었다. 공부해야할 이유를 몰랐으니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했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수능과 상관없는 음악, 미술, 체육, 윤리, 철학, 일본어. 수능 과목 중엔 과학 하나정도였고 나머진 크게 관심 없었다. 이정도면 대학에 간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공계열이 아니라서 그나마 잘나온 과탐 점수를 입시원서에서 뽐낼 수 없었다. 당시 비이공계 전공은 언어, 사탐 성적을 기본으로 평가하고 추가로 영어나 수학, 과탐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대학인데 등록금이 없어서 기약없는 휴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까진 부모님이 얼마를 벌고 있고 우리집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었다. 그냥 부모님께 지원받고 사는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 사는지, 뚜렷한 삶의 목표도 없었으니까 아무 생각없었던게 당연한걸지도. 그냥 재미있어 보였던 광고를 만들고 싶었고 광고는 카피라이터가 만드는 줄로만 알고 있을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다. 수업에 출석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친구들과 놀기 바빴지 학교 수업엔 관심 없었다. 그러다보니 학교성적은 개판이었고 결국 성적미달로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등록금이 없어 미안하다는 고백과 함께 2학년부터는 더이상 그 좋아하던 친구들과도 함께 할 수가 없게되었다.


막막했다. 친구들이랑 좀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서울집으로 안가고 춘천에 남아있었다. 좀 놀다보니 생활비가 떨어졌다. 집에 전화해서 용돈 좀 달라 말하려하다가, 그냥 잘지낸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학교 앞 당구장에서 알바를 했다. 가게 오픈해서 청소하고 사장님 출근 전까지 운영하는 일이었다. 일당은 7천원. 그걸론 생활비가 부족해 맥주바 알바도 시작했다. 합쳐서 월 40만원 정도 받았고 그걸로 친구들이랑 놀았다.


그러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한두명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갑자기 현타가 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친한 친구들은 군대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다들 날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나 혼자 뒤쳐진 것 같아 두려웠다. 학기가 끝날무렵 하던 알바를 정리하고 서울집으로 올라왔다. 군대는 가기 싫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없이 이대로 현실에서 도피하듯 가고 싶진 않았다. 내가 번 돈으로 월세내고 밥 사먹어본 경험 덕분일까. 서울에 와보니 이제야 우리집 경제사정이 21년만에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2003년, 당시 미국대 이라크전쟁으로 경제불황이 시작되고 이어진 카드대란으로 신용불량자가 속출하던 시기였다. 아빠, 엄마의 눈빛은 늘 어두웠던걸로 기억한다. 귀한 아들이라고 무임승차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먹을 밥은 내가 벌어와야 했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 김훈, <라면을 끓이며>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어릴적부터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상태로 행복하려면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남들 먹는거 그깟거 내 입맛 아니라며 안먹고 싶은 척 해야하고, 갖고 싶은거 별로 생각없다며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점점 사라지다보면 가난한 삶이 익숙해지고 그자리에 머물게 된다. 서커스단에 어릴적 잡혀온 코끼리가 다 큰 코끼리가 되서도 도망갈 생각을 안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행복하려면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보면 지금의 나를 키운 팔할은 가난이었다. 부모님의 월급통장을 보면 우리가족의 미래가 안보였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느꼈던 내 두려움의 정체는 희망이 없는 암울한 미래였다. 친구들과 놀기좋아했던 철부지 꼬마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사회를 몸소 체험하고 점점 철든 애어른이 되어갔다. 대책없는 밥벌이에 꾸역꾸역 밥을 벌고 있지만 밥벌이가 목표가 아니라고 했던 김훈의 글처럼, 매일 돈을 벌고 있지만 한시도 돈을 버는 목적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돈을 버는건 살아내기 위해서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이왕 사는 인생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결국 후회하지 않을 삶의 방향을 정하고 지금은 어디 내놔도 굶어죽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먼훗날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의 성공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라고 물어본다면 가난 '덕분에'라고 하는게 맞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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