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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18. 2019

늦게 칼을 뽑으면서

후발선지(後發先至)

늦게 칼을 뽑으면서     


『장자』 잡편 「설검」은 장자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투검(鬪劍)만을 좋아하는 조왕(趙王)을 세 가지 검(三劍) 이야기로 설득시킨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천자지검(天子之劍), 제후지검(諸侯之劍), 서인지검(庶人之劍)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대체로 우의(愚意)가 졸렬하다는 평을 받는 글입니다. 주지(主旨)나 어투가 전국책(戰國策)의 그것과 비슷하다하여 전국말의 종횡가(縱橫家)가 지은 글이 잘못 섞여 들어왔다는 평까지 받습니다. 외편이나 잡편의 이야기들은 내편의 주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보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종의 거세담론의 형태를 지닌 것들이라면 그 서사논리의 정연성(整然性)만 보고 청탁(淸濁) 구분 없이 올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장자의 주장이 기존의 구축담론들을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편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후대로 내려오며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형편입니다만,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설검」이 장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나 검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좋은 교본이 됩니다. 다음의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무엇을 내게 가르치려고 왔는가?” “저는 대왕께서 칼싸움을 좋아하신다고 들었기에 검에 관해서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라고 장자가 대답했다. 왕이 말했다. “그대의 검은 몇 사람이나 상대할 수 있는가?” 장자가 말했다. “저의 검은 열 발짝에 한 사람을 죽이되 천리를 가도 저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十步一人 千里不留行).” 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천하무적이로다!” 장자가 이어 말했다. “대저 칼싸움의 묘란 상대가 공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두고 이(利)로 유인해서 상대보다 늦게 칼을 뽑으면서 상대보다 먼저 칼을 닿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이치를 한 번 시범코자 합니다(夫爲劍者 示之以虛 開之以利 後之以發 先之以至 願得試之).” 왕이 말했다. “선생은 좀 쉬시오. 숙소에서 쉬며 연락을 기다려 주시오. 시합 준비가 되면 선생을 부르리라.” 왕의 명으로 장자와 상대할 검사를 뽑는 선발 시합이 거행되었는데 참혹하게도 이레 동안에 사상자가 육십 명이 넘을 지경이었다. 왕은 그 중 대여섯 명만 골라 궁전 아래 검을 받들고 늘어서게 했다. 그러고는 장자를 불러내서 말했다. “오늘은 저 검사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장자가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바입니다.” 왕이 말했다. “선생이 쓸 무기는 긴 것과 짧은 것 중 어느 것이오?” 장자가 대답했다. “저는 어느 것이든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세 가지 검이 있는데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삼검(三劍)에 대해서 설명을 드린 뒤에 시합을 하고 싶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 삼검이란 게 무엇인지 듣고 싶소.” 장자가 말했다. “천자의 검, 제후의 검, 서인의 검입니다.” [『장자』 잡편, 「설검(說劍)」, 안동림 역주, 『莊子』 및 조관희 역해 『莊子』 참조]     


장자는 왕이 ‘천자의 검’을 쓸 생각은 않고 고작 ‘서인의 검’에 빠져서 정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나무랍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혼비백산, 검투사들을 다 내치고 비로소 군왕으로서의 처신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교훈적인 내용은 『장자』를 읽다 보면 어디서고 마주칠 수 있는 흔한 ‘우화의 정석’입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출현하는 <후지이발 선지이지(後之以發 先之以至)>라는 말은 그저 말에 그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대목은 검도 수행의 한 요점을 설파하고 있는 것으로 현재까지도 그 위용을 자랑합니다. 흔히 <후발선지(後發先至)>로 줄여서 말합니다만, 그 경지가 바로 검도의 한 극의(極意)라는 것은 검도가들이면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후발선지를 아는 (후발선지가 되는) 사람이면 검도의 고수이고 그것을 모르면 하수입니다. 그것만 알면(되면) 검도는 아주 즐거운 놀이가 됩니다. 웬만큼 한다는 검객들끼리는 오직 그것을 두고 서로 밀당을 합니다. 

<십보일인 천리불유행(十步一人 千里不留行)>도 예사롭지 않은 말입니다. 일족일도(一足一刀), 본디 일보(一步)가 일검(一劍)입니다. 한 걸음 안에 생사가 있는 것이 칼의 세계입니다. ‘십보일인’이라는 것은 적어도 열 수 안에는 한 사람을 잡아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십보일인’이라는 말은 자신의 검술 기량을 말하는 적절한 화법이 됩니다. 그것 역시 ‘후발선지’와 함께 이 글의 원작자가 한 칼 했던 이였음을 드러내는 한 징표가 됩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은 일부러 틈을 내어주고 공격하는 이를 ‘받아치는 것’이 <후발선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발선지>가 그런 ‘술수’의 경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외형적인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심안(心眼)의 획득과 관련된 어떤 경지인 것 같습니다. 의식의 차원을 앞질러서 작동되는, 이른바 ‘스스로 기술을 일으키는 어떤 힘’의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감(感)으로 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백련자득(百鍊自得)하는 경지, 일기일경(一機一境)의 경지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족 한 마디. 인생 일반에서도 <후발선지>가 처세(處世)의 극의(極意)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평생 하수를 면치 못합니다. 칼을 날리려는 자는 누구든 그 발심(發心)의 정지 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그 정지 순간을 읽히지 않는 이가 진정한 고수일 것입니다). 그 마음을 읽어내어야만, 그래서 ‘늦지만 빠른’ 칼을 쓸 수 있어야만, 인생살이의 고수 행세를 하며 살 수 있습니다.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이, 검도판에서는 제법 그 경지를 엿보며 살아온 터였습니다만 인생판에서는 늘 그 경지를 몰라 속수무책으로 하수로만 살아온 한 시골무사의 신세한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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