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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17. 2019

은유적 인간, 환유적 인간

진정한 정치적 인간의 출현

은유적 인간환유적 인간     


언젠가‘명사적 삶과 동사적 삶’에 대해서 한 철학자가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논리에 따르면 본질주의적 태도는 명사적 삶을 요구하고 행동주의적 태도는 동사적 삶을 추구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의 어조는 동사적 삶을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동사처럼 다양한 어미변화가 있는 행동주의적 태도가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홈 패인 공간’에 종속된 틀에 박힌 삶보다는 ‘매끄러운 공간’에서 노마드적인 삶을 추구하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고 있었습니다. 두 주장 공히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삶만이 주체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강조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조금 다른 층위에서. 저는 ‘은유적 인간과 환유적 인간’이라는 분류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삶’의 두 가지 유형이라고 할 만한 것입니다. 한 쪽은 동일성의 원리로 자기를 키워나가고 다른 한 쪽은 인접성의 원리로 자기를 키워나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은유가 연상법칙을 따라 만들어지는 기호체임에 비해 환유는 연속법칙(the principle of contiguity)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호체이다. 은유와 환유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은유는 다른 것에 의해서 어떤 것을 생각해 내고 그 다른 것에 대해 잘 아는 바에 의해서 새로운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환유는 어떤 것에 의해서 그것에 연결된 나머지 부분을 대표시키는 일,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것에 의해 감추어진 전체를 지시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 속담에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환유의 기능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환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환유(metonymy)와 제유(synecdoche), 두 가지이다. 이 두 가지에 공통되는 것은 연속(또는 직접 연계)이라는 주개념이다. 이 두 가지의 다른 점은, 환유는 그것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을 대치시키는 것이고, 제유는 그것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 전체를 대표시키는 것이다. 환유의 주(主)어휘는 대치이고, 제유의 주(主)어휘는 대표(또는 표상)이다. 은유는 그 구성에 있어서 보다 상징성이 강한 데 비해, 환유는 도상이나 지표에 가까운 기호다.

은유는 보다 가공적이고 초현실적 효과를 기호 사용자의 마음에 일으킨다. 이에 반해 환유는 도상이나 지표에 가까운 기호이기 때문에 사용자의 마음에 현실적 효과를 일으킨다. 전체를 대표하는 환유, 즉 제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거기엔 발붙일 곳이 없다>라는 말에서 <발>은 사람 전체를 대표한다. <눈 좀 붙여야겠다>라는 말은 <눈>을 그냥 감기 위해 감겠다는 말이 아니라, 말한 사람이 잠을 좀 자야겠다 또는 머리를 쉬게 해야겠다는 환유이다. 관련된 것을 대치하는 환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 IBM 샀어>라고 친구가 말했을 때, 그가 산 것은 IBM 회사 제품인 컴퓨터이지만, 그것이 제조원을 대신한다. <워싱턴은 러시아에 대한 재정 원조안을 환영할 것이다>에서 워싱턴은 미국 정부 당국을 대신한다. 환유는 매우 강력한 기호이다. 환유의 힘은, 그것이 어떤 현실체와 직접 연관되어 있어 현실적 효과를 일으키는 일뿐만 아니라, 기호 사용자로 하여금 환유의 나머지 부분을 메우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후자는 환유의 진정한 힘이다. 환유가 드러낸 일부로부터 환유가 숨긴 부분으로 사유를 확대해 나가게 하는 것―이것이 환유의 엄청난 힘이다.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66 쪽 이하]     


은유는 일상생활의 바탕이자 대상이 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현실을 축조합니다. 은유적 현실은 동일성(유사성)의 원리에 입각해 어떤 비슷한 특성에 근거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상적이고 초현실적 효과를 사람의 마음에 일으키기도 합니다. 교리를 설명하는 종교적 경전들이 수많은 은유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에 비해 환유는 사용자의 마음에 현실적 효과를 일으킵니다. 그것은 역지사지나 동병상련과 가까이 있습니다. 논리를 뛰어넘는 성인들의 가르침은 늘 환유적 실천과 함께 합니다. 무지한 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은유를, 지식이 넘치는 자들을 깨뜨리는 데에는 환유를 사용합니다.     

은유적 인간과 환유적 인간은 자신들의 ‘확장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도 구별됩니다. 동일성만으로 확장을 꾀하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소수 정예라는 일체감을 가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을 도외시하다가 역경을 자초합니다. 그래서 그들 은유적 인간들이 ‘광장’으로 나오면 실패할 공산이 큽니다. ‘현실의 광장’은 인접성으로 나를 확장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환유적 인간만이 군중의 연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비관습적 은유가 되어 대중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도 전달하면서, 동시에 기호 사용자로 하여금 환유의 나머지 부분을 메우도록 유도하여 ‘현실의 광장’도 ‘점령’할 수 있는, 은유적이면서 동시에 환유적인, 진정한 정치적 인간의 출현을 기대해 봅니다. <2012.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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