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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2.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서사의 힘

서사의 힘, 발견의 미학 1

   

앞에서 서사는 오직 그 효과를 볼뿐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태도와 방향의 문제라면 이제 서사의 실행적 측면을 살펴보자.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 막상 서사의 글쓰기를 행하고자 할 때 우리를 가장 막연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문제다. 반죽은 풍성한데 그 재료를 어떻게 가공할 것인지가 결정되지 않았으니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팥소가 든 찐빵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끼니가 될 수 있는 만두로 빚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먹기 좋은 국수를 뽑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반죽에 손을 댈 수가 있다. 

반죽을 다루는 법, 서사의 요령은 단 한 가지다. 오로지 ‘발견’이다. 생활의 발견이든, 사랑의 발견이든, 희생의 발견이든, 반성의 발견이든, 아름다움이나 거룩함의 발견이든, 남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한 가지 발견만 있으면 언제든지 반죽을 치대어 내가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찐빵이든, 만두든, 국수든, 무엇이든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발견’이다.

직장 선배 중에 나이 들어 수필가로 등단한 분이 있다. 아마 환갑 직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분이 하루는 지나가는 나를 자기 연구실로 데려갔다.

“글쓰기에 대해서 자문을 좀 해 주세요. 무엇에 가장 주안을 둬야 할까요?”

그때가 아마 등단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던 것 같다. 좋은 작품 두어 편으로 천료(추천 완료)가 되거나 아니면 신인문학상 같은 것을 받게 되어 있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지역에서 문예지를 발간하고 있는 사람이 문예대학이나 수필아카데미 같은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수강생 중에서 자질이 보이는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등단을 시키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발견 아닐까요?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매번 하나의 발견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다음은 독자에게도 발견의 기쁨을 나누어 주는 구성의 묘를 살리는 일이겠고요.”

다문다문 지역신문에 칼럼도 쓰시는 분이라 다른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듯했다. 본인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

“장르가 수필이니까 간간히 자기 풍자도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풍자가 제대로 작용하는 글들은 마치 농구공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듯 하는 탄력감을 가지거든요. 나르시시즘도 어느 정도 제어가 되고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혹시 너무 나간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전공이 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정치학 쪽이었는데 너무 전문 용어를 쓴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에는 별반 반응이 없었다. 

그분이 얼마 전에 또 복도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모더니즘에 대해서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은데....”

이제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이쿠, 그건 좀 어렵습니다. 그냥 그때그때 문맥을 보고 이해하는 수밖에....”

괜히 또 끌려들어 가 진땀을 흘리는 게 두려워서 얼른 그렇게 발뺌을 했다. 

시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모든 글쓰기의 요체는 발견이다.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활에서, 아니면 책을 읽다가 발견한 것을 글로 써도 좋고, 글을 써 나가는 중에 예상치 못했던 발견을 만나도 좋다. 시작부터 발견으로 시작해도 좋고 마지막을 발견으로 장식해도 좋다. 발견을 목적했으나 아무런 발견을 이루지 못해도 나쁜 것은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니까 언젠가는 발견을 이루게 되어 있다. 나쁜 것은 딱 하나다. 아무런 발견 없이도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나쁜 것이다. 그것만 피하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 손 안에서 꽃이 피어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내가 작가의 운명을 처음 직감한 것은 스무 살의 막막함 속에서였다. 한정 없이 밀려드는 무중력감에 부초(浮草)처럼 흐느적거릴 무렵이었다. 사범대학이라 이미 진로는 결정이 되어 있었고 학교는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따분한 통과의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 작은 발견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1976)를 읽던 중이었다. 대학 2학년 때, 국어학 개론인지 국어사 개론인지 딱딱한 공부가 싫어서 수업시간 중에 몰래 읽던 중이었다. 소설 속의 글자들과 게릴라전을 벌이던, 간혹 띄엄띄엄 들려오던 노교수의 목소리가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모종의 불안감을 은신처 삼아 불쑥불쑥 출몰하던 그것들이 한순간 깨끗하게 섬멸되었다. 마치 소이탄(燒夷彈)이라도 맞은 듯, 그들이 암약하던 내 귓가의 소란이 일순 정적으로 채워졌다. 윙 하는 소리가 지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몇 초나 지났을까, 다시 뭇소리들이 땅굴에서 기어 나오는 새까만 게릴라들처럼 한둘 그 모습을 보이면서, 그것들 위로, 무엇인가 빠른 속도로 내 머리를 가로질러 지나쳤다. 그 횡단(橫斷)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줄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 내 머릿속은 전에 없이 평온해졌다. 어떤 무겁고 딱딱한 것 하나가, 오래된 불구의 느낌 하나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저 먼 곳 어디로, ‘태평양’ 쯤이나 되는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아, 그랬던 거구나, 나지막이 나는 그렇게 내뱉었다.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느낌 같기도 했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 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황석영, 『몰개월의 새』 >  

  

그 대목을 읽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비비며 그 대목을 읽고 또 읽었다. ‘몰개월’, 그 생소한 이름의 ‘고래 뱃속’을 그렇게 ‘우연한 사건’으로 만났다. “인생에는 유치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주인공의 독백이 내게 그대로 전이되었다. 비로소 그때 내 인생의 유치한 것들과 일괄 작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추장과 내가 가까워진 것은 야간전투 훈련장에서였다. 우리는 2인용 텐트를 같이 썼다. 추장은 맨손으로 입을 달래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음식이든지 말만 나오면 입으로 요리를 했다. 언제나 배가 고픈 우리는 그의 얘기에 빨려 들어 거의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영계백숙으로 포식을 했다. 그것도 사흘이나. 추장은 십여 리나 되는 양계장에서 여섯 마리의 닭을 생포해 와서는 구두끈으로 닭발을 묶어 우의로 덮어두었다. 우리는 한밤중에 일어나 철모에 닭을 튀겨 먹고 독도법 훈련이며 매복 훈련에 나갔다. 야간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는 추장이 구해 놓은 보급품을 먹었다. 무, 수박, 고구마……. 추장은 늘 전우의 영양상태를 걱정했다. 

“한잔 빨러 가자.” 

추장이 판초우의를 입고 나를 깨웠다. 그가 우의를 들추자 새 군화가 세 켤레나 대롱거리고 있었다. 사단 보급창을 거덜 냈는가? 통신대원들의 새로 받은 군화를 훔친 것이다. 우리는 당당히 연병장을 구보했다. 버젓하게 뛰어가야 탈이 없다는 그의 주장이었다. 철조망을 무사히 통과한 우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바다를 뒤편에 둔 몰개월은 특교대가 생기자 주막이 하나씩 생기면서 슬레이트 지붕에 블록으로 지은 바라크들이 이십여 채 생겨났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인지 한 년도 내다보지 않았다. 그때 길옆에 허엽스레한 것이 보였다. 시궁창에 하반신을 담그고 엎드린 여자, 그렇게 미자를 만났다. 미자는 억병으로 마신 것 같았다. 몸은 형편없이 마르고 키는 멀쑥했다. 슈미즈만 입은 여자를 빗속에 버려둘 수 없었다. 그보다 나는 시궁창에 쳐 박힌 여자의 그런 모양에 욕정을 일으켰다. 

우리는 송장을 치우듯 미자를 들었다. 갈매기 집을 찾아갔을 때 주인 여자는 넋두리를 폈다. 이 년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 줘야지. 이 쓸개 빠진 년들이 애인한테 편지질을 하는데 어떤 년들은 열, 스물에게 쓴다우. 미자년이나 애란이나 가끔 술 쳐먹구 지랄들을 하는데 아마 상대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모양이지. 제대하구 한 번도 들여다보는 놈 없는데. 나는 미자를 아랫목에 누이고 이불을 덮어줬다. 우리가 술을 먹는 동안 이따금 이불을 들치고 건너다봤지만 모른 척했다. 추장이 빠끔이라고 별명을 붙일 정도로 미자는 마른 얼굴에 눈만 컸다. 

가상 늪 지역을 허우적거리며 훈련을 받았다. 진흙탕 물에 전신을 담그고 총을 받쳐 들고 건너다 포복을 하다 늪 지역을 지나 다시 부비트랩이 밀집한 곳을 지났다. 함정이 있고 인계철선이 질러있고 죽창이 있기도 한다. 당한 병사는 모두 전사자가 되어 기합을 받는 그 훈련에서 나는 폭약을 터뜨렸으므로 전사 분대로 끌려갔다. 

그때 주보병이 뛰어왔다. 면회신청이다. 어이없게도 내 이름이 불렸다. 한복을 입은 여자가 나를 반긴다. 나는 그 여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몰개월이 어쩌구, 똥까이가 어쩌구, 하는 주변의 소리에 미자가 가져온 김밥과 삶은 고구마를 아귀아귀 먹어댔다. 

미자는 내 뒷주머니에 담배도 넣어 주었다. 밤에 오라는 그녀의 말대로 나는 담치기를 했다. 미자는 상사와 앉아 있다가 뺨을 맞고 있었다. 갈매기집을 나서고 말았다. 쫓아 나온 미자는 코피가 터져 있다. 나는 논가에 데리고 가 얼굴을 씻어 주었다. 

“초가 다 타면 자요.” 

나는 은근히 조바심이 나서 미자를 건드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에 도통 기별이 가지 않았다. 

“내다봐요. 고깃배가 보일 거야. 갈매기들이 많이 울지요?” 

나는 미자를 먹지 못 했다. 낯을 씻길 때부터 먹지 못하게 무관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귀대하는 길에 미자에게 들렀다. 미자는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시중을 들었다. 

“모레 떠난다.” 

“집에 갔었다면서요? 좋은 사람 있어요?” 

“있었는데 시집갔더라야.” 

“내일 밤에 나와요. 전부 몰려나올 거야. 꼭…… 한 코 주께.”  <황석영, 『몰개월의 새』>   

 

세상에는 어디 하나 하찮은 것이라고는 없는 법인데 젊어서는 그걸 잘 모른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그게 안쓰럽다. 그래서 황석영은  「몰개월의 새」라는 소설을 썼고, 나는 지금 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황석영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방금 같이 담배를 나누어 피우던 전우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걸 보면서, 유치하게 여겼던 술집 작부(미자)의 이별 선물(오뚝이 인형)을 바다(남지나해)에 던져버린 것을 못내 후회했던 것처럼, 나 역시 젊어서 생각 없이 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후회했다. 미로(迷路) 속에서의 그 젊은 날들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망각의 바다에 그냥 던져버렸던 것을 후회하고, 쓸데없이 경멸했던 모든 가난과 수치와 무지들에 대해서도 용서를 빌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내 청춘은 그저 빈칸에 불과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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