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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3. 2019

회고(回顧)는 나의 힘

오디세이아

회고(回顧)는 나의 힘   

  

“남자는 뒤끝이 없다.” 며칠 전 점심 식사 때의 방담(放談)에서 나온 말입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퇴직을 코앞에 둔 직장 선배의 이런저런 회고담을 듣던 중에 나온 말입니다. 아마 원만한 직장 생활을 하려면 뒤끝이 없어야 된다라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늘 역지사지(易地思之) 해서 직장의 화평에 기여해야 한다는 취지인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할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오래 전에 삭혔던 불쾌한 경험들이 꿈에 자주 나타납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잠자리를 어지럽히는 개꿈들이 나타나는 패턴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콜라보(collaboration)라는 영어 단어 하나가 주인공이었습니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일들이 이 단어를 중심으로 연상되고 있었습니다. 단어와 경험이 어울어지는 꿈은 요즘 들어 나타나는 새로운 패턴입니다. ‘협업(協業)’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는데 인터넷 단어장을 찾아보니 불어에는 “남성형 명사 [구어] (제2차 대전시) 독일협력자, (적과의) 내통자 (collaborateur의 약어)”라는 다른 뜻이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 무의식의 내통자가 자기 정체를 밝히는 자작극을 펼쳤던 게 아닌가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조금 더 소개하겠습니다. 그 이야기가 기나긴 회고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입니다. 잘 정리된 글이 있어서 통째로 옮깁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중국에서는 ‘시경’이 쓰였다. 시경이 중국 문학의 원형이라면 호메로스의 작품은 서구 문학의 원형으로 꼽힌다. 

오디세이아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후 10년 동안 고향 이타케로 향하는 여정에서 겪는 모험과 부인 페넬로페를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 출진을 앞두고 처음에는 미친 척하고 거부했으나, 전쟁에 참가한 후에는 그리스군의 패주를 저지하는 등 무장으로서 활약했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분노해 참전하지 않자 그를 설득하기도 했다. 

특히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표현처럼 신들도 인정하는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가 되면서 지혜로운 자의 ‘원형’이 됐다. 오디세이아에서 나온 영어 ‘odyssey’는 훗날 경험이 가득한 긴 여정을 뜻하는 명사가 됐다.

그렇다고 그가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다. 때로는 잔인한 영웅이었다. 그는 트로이군을 정탐하기 위해 트로이 성으로 향하다 정탐 나온 트로이 병사 들론을 발견하고선 트로이의 정세를 알아낸 뒤 그를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살해한다. 그런가 하면 트로이 전쟁 출진을 앞두고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미친 척을 하다 팔라메데스에 의해 발각돼 전쟁터로 향하게 되는데, 오디세우스는 이에 복수심을 품고 전쟁터에서 팔라메데스를 트로이와 내통한 첩자로 만들어 그를 죽게 만든다. 

일리아스가 아킬레우스를 주인공으로 트로이 전쟁의 경과와 그리스군의 승리를 노래한다면, 그 후편에 해당하는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그가 트로이를 떠나 귀향하기까지 겪은 온갖 모험과 아내와 재회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귀향 소식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들어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신들은 회의를 소집해 오디세우스가 귀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고 제안하고 이에 따라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가서 격려하고 용기를 준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제5권에서야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때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떠나 귀향길에 올랐는데 님프 칼립소의 동굴에서 7년 동안 지내고 있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자신과 같은 불사의 몸과 재물, 권력을 주겠다고 구애를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칼립소는 “진실로 나는 몸매와 체격에서 그녀(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못지않다고 자부해요”라며 오디세우스를 잡으려 하지만 그의 귀향 의지를 꺾지 못했다. 칼립소는 결국 뗏목을 마련해 오디세우스가 떠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제우스가 전령 헤르메스를 칼립소에게 보내 오디세우스를 고향으로 보내주라는 지시를 내린 후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잠시 오디세이아의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전개는 잠시 오디세우스가 그동안의 여정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9~12권). 그동안 3인칭으로 언급되던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떠나 귀향길에 올라 칼립소의 동굴에 오기 전까지 자신이 겪은 여정 이야기를 1인칭 화법의 회고 형식으로 들려준다. 이때 포세이돈의 아들 폴뤼페모스의 눈을 멀게 해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이야기가 나온다. 오디세우스가 귀향을 못 하는 이유가 바로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또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그 유명한 ‘바람을 다스리는 가죽자루’ 이야기도 나온다. 아이올로스가 황소의 가죽을 벗겨내 자루를 만들어 그 안에 울부짖는 바람을 담아 오디세우스에게 줬다. 덕분에 오디세우스는 무사히 바람을 길들여 고향 이타케의 앞바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잠을 자는 사이 전우들이 가죽자루에 금은보화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가질 욕심에 그만 자루를 풀고 만다. 그러자 격렬한 바람이 다 터져 나와 폭풍이 됐고 그 때문에 그들은 다시 먼 바다로, 아이올리에 섬으로 도로 밀려갔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잠시 저승에 가 아가멤논의 혼백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의 심리에 결정타를 가한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아내와 정부에 의해 살해된 이야기와 함께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케에 당도했을 때의 처신에 대해 일러준다. 한마디로 ‘아내를 믿지 말라’는 주문이다. 

오디세우스는 또 저승에서 만난 아킬레우스에게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말한다.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러운 오디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3000년 전에도 현세적 삶을 중시한 모양이다.

이어 오디세우스는 사이렌 자매들의 유혹과 무시무시한 스퀼라 등에게 부하들이 모조리 잡아먹히는 상황에서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과정을 회고한다. 

오디세우스의 회고는 이렇게 끝이 난다.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파이아케스족에게 값진 선물을 받고 이곳을 떠나 이타케에 도착한다. 지옥에서 만난 아가멤논의 조언대로 오디세우스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만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아내 페넬로페에게는 거지로 행세한다. 이후 둘은 결국 행복하게 재회한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제우스가 아테네 여신을 지상으로 다시 보내 오디세우스가 언제까지나 이타케의 왕이 되게 해주겠다는 신들의 다짐을 전한다. 이때 이타케에서는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데 페넬로페에게 구혼했던 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안티노오스의 아버지 에우페이테스가 아들의 복수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에우페이테스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창에 쓰러지면서 오디세이아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복수로 일리아스를 그렸고, 오디세우스의 고행과 귀향을 소재로 오디세이아를 만들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이 가장 용감한 영웅을 상징하는 아킬레우스라면,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은 지략을 상징하는 오디세우스다. 즉 일리아스가 아킬레우스의 뛰어난 힘과 목숨을 불사하는 영웅의 명예심을 주제로 삼았다면,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지혜와 고향에서의 안식을 추구하는 인간 본능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일리아스의 주제인 분노와 오디세이아의 주제인 고향 혹은 귀향은 3000년 동안 서구 정신사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주제가 됐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매경이코노미 제1709호(2013.05.29.~06.04)]    

 

나이 들면서 지난 일들에 대해서는 가급적 주석을 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꼭 해야 될 일이 있으면 ‘설명’보다는 ‘묘사’에 주력하려 합니다. 요즈음의 저의 개꿈들은 그런 제 의식적 노력에 대한 무의식 쪽의 반발이 아닌가 여깁니다. 의식과 무의식 간의 간극, 그 사이에 우리의 인성(人性)이 존재합니다. 가능하면 그 간극을 넓게 벌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인문학의 소임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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