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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4. 2019

스승과 제자

스승을 견디는 제자

스승과 제자     

제자로 태어나 스승으로 죽는 게 인간이다. 직업이 가르치는 자였으니 그 감회가 남다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하루 만에, 학생에서 선생으로 신분이 변화한 때가 생각난다. 그때가 아마 가장 크게 ‘내가 변한 기분’을 느꼈던 때였지 싶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변한 기분’은 한 번씩 있었다. 작심하고 공부를 해서 우등생이 되었을 때, 교내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을 때, 처음으로 연애를 했을 때, 소설작품을 출품해서 상을 받았을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검도 경기에 출전해 우승했을 때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일종의 정체성 업그레이드였다. 그런 ‘갑자기 내가 바뀐 기분’들이 스승으로 살아가는 느낌을 한층 더 배가시켰던 것 같다. 이제 조만간 그 직업에서 물러나야 할 운명이다. 지난 세월에 부끄럽지 않도록 성의 있는 마무리를 할 시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스승의 자리와 제자의 자리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본다.      

누군가가 ‘최초의 스승은 공자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쳐서 그를 변화시킨 최초의 교사가 공자라는 것이다. 공자가 스스로 스승으로 여긴 이는 주공(周公)이었다. 평생을 그 스승의 시선 안에서 살았다고 공자는 토로한다. “요즘 주공을 꿈에서 뵌 지가 오래되었다”라는 공자의 말이 그런 의미로 해석된다. 두 사람은 시대를 격해서 존재했으므로 공자 혼자서 제자 노릇을 한 셈이다. 그렇게 스승을 만들어 섬기고 혼자서 스승이 된 사람이었으니까 공자가 ‘최초의 스승’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최초의 스승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을 평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내 제자로서 학업에 힘써 육예(六藝)에 통한 자는 77명이 있다. 모두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덕행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정치에서는 염유(冉有), 계로(子路), 변설에서는 재아(宰我), 자공(子貢), 문학에서는 자유(子遊), 자하(子夏)가 특히 뛰어났다. 그러나 다 각기 결점도 있어서 사(子張)는 잘난 체하는 데가 있고, 삼(參,曾子)은 둔한 편이며, 자(子羔)는 우직하고, 유(由,子路)는 거친 데가 있다. 도를 즐기는 회(回,顔淵)는 자주 끼니가 떨어지는 형편이다. 또한 사(賜,子貢)는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돈벌이에만 힘을 기울이는데, 그래도 그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다.<『사기』, 「중니제자열전」>     


공자 시대의 주요 교과목은 보통 육예(六藝)라 하여 의례(禮), 노래와 춤(樂), 활쏘기(射), 마차 몰기(御), 글쓰기(書), 셈하기(數)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공동체의 규약인 예와 악, 국가 방위의 무력이 되는 활쏘기와 마차 몰기, 그리고 행정 업무 처리 수단인 글쓰기와 셈하기 등 고대의 테크노트라트였던 사(士) 계급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기도 했다. 고대의 사(士) 계급은 문무(文武)를 겸전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들 중에서 지위를 높인 자들이 대부(大夫)가 되었다. 그런 실천적 지식에 통(通)했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몇 사람을 지목해 그 장단을 변별했던 것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 내용으로 공자의 제자들을 규정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유추를 행한다. 고전 읽기에서는 콘텍스트(맥락)의 재구(再構)가 관건인데 그런 해석 작업에 공자의 제자 평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공자가 제자를 호명(지목)할 때 전후를 달리하며 말하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앞에서는 계로라 했다가 뒤에서는 유라고 한다. 앞에서는 안연이고 뒤에서는 회, 앞에서는 자공이었는데 뒤에서는 사가 된다. 자(字)와 명(名)을 나누어서, 칭찬을 할 때는 어른 이름인 자를 쓰고 부족한 면을 지적할 때는 아이 부르듯 이름을 불러 다정함을 배가시켜 스승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내는 방법이었다. 아끼는 제자들이 죽었을 때도 공자는 그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 했다. 그런 것들을 배워서 안 것은 아니고, 어느 날 저절로 그런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별 뜻 없이, 생각나는 대로 위대한 스승들의 특징을 몇 가지 적어 본다. 첫째 그들은 적지 않는다. 그들은 주로 말로만 제자를 가르친다. 맥락을 잘 활용하고 정감적인 아우라 안에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감적 지혜, 살아있는 지식 전달에 힘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주로 강조하는 것은 ‘길 없는 길’, ‘그때그때 달라요’와 같은 것들이다. ‘변치 않는 것은 없다’를 가르친다. 둘째, 그들은 까다롭다. 요구(demand)가 많은 사람이다. 제자들은 늘 스승의 요구에 허덕인다. 안회와 같은 예외가 있지만 그는 일찍 죽는다. 사도 바울과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는 스승이 죽고 나타난다. 스승들은 늘 불패의 환상을 제시하고 그걸 믿으라 한다. 제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믿어야 한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라는 스승의 말 한 마디에 제자는 자신의 전 인생을 걸어야 한다. 셋째, 그들 위대한 스승들은 살아생전보다 죽어서 더 추앙된다. 살아서는 독배를 마시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허잡한 음식을 먹고 체해서 죽거나, 마누라도 자식도 없이 쓸쓸히 죽거나, 높은 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 죽는다. 살아서는 풍자적인 의미로서만 ‘왕’ 대접을 받지만, 죽어서는 진짜 ‘왕’이 된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스승도 착하고 성실한 ‘위대한 제자’의 도움이 없으면 스승이 될 수 없다. 위대한 제자의 덕목은 무엇일까? 첫째, 그들은 초인적으로 적는다. 그들은 하이퍼그라피아(글쓰기 중독증)다. 하루도 적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들이다. 플라톤도 적었고, 증삼과 유약도 적었다. 아난, 바울, 모두 스승의 말을 하나 없이 기억해내고 끊임없이 적는(쓰는) 제자들이었다. 중천을 헤매는 스승의 말들을 일이관지(一以貫之), 맥락을 잡아서 그것을 지상의 복음으로 고정시키는 역할을 그들이 한다. 둘째, 그들은 끝없이 견디는 자들이다. 위대한 제자는 스승을 견딘다. 사실 그 점이 그들의 가장 큰 덕목이다. 스승이 뭐라고 하든지 그들은 묵묵히 스승을 견딘다. 어떤 의미에서 스승이 광(狂)이라면 제자는 견(狷)이다. 스승이 현실을 저만치 앞서서 가는 자라면 제자는 회의 없이 묵묵히 그 뒤를 따르는 자다. 셋째, 그들은 모든 공을 스승에게 돌린다. 오직 주님의 말씀, 선생님의 말씀, 부처님의 말씀만 있을 뿐 자기 말은 없다. 자공이 한 때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면서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구름같이 제자들이 몰렸다. 자로가 그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갔습니다. “스승님이 살아계신데 감히 네가 그런 작태를 벌일 수 있느냐”고 엄히 나무랐다. 자공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본디 시골무사인 자들에게는 스승이 없다(스승 없이 막된 칼을 쓰는 자를 두고 ‘시골무사’라 부른다). 젊은 시절 어느 책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스승에게 무엇을 배워 본 적이 없었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 참 무식한 시절이었다. 제대로 스승을 견뎌본 적도 없는 주제에 그런 오만과 방자를 떨었던 것이 무척 후회스럽다. 

스승과 제자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갈등하고 반목하는 관계일 수도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애증과 경쟁관계가 들어서는 경우도 흔하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자는 그것을 넘어서야 제자다. 회의는 하되 스승을 견뎌야 나중에 자신도 스승이 될 수 있다. 최소한, 위대한 제자가 되어 위대한 스승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지만 지금이라도 착하고 성실한 제자가 되어 위대한 스승 한 분 모셔보고 싶다. 절차탁마(切磋琢磨) 백련자득(百鍊自得)!

<2012. 3. 23.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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