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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5. 2019

유피테르(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박쿠스

에로티즘

유피테르(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박쿠스   

  

요즘 색안경을 끼고 다니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해만 뜨면 색안경을 끼고 다닙니다. 색안경을 끼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조금 어두워지는 것을 용납하면 여러 가지 편의와 평안이 허용됩니다. 따가운 것들이 두루 차단됩니다. 햇빛도 차단되고, 남의 시선도 차단됩니다. 원래 이 글은 구청 소식지에 실을 원고였는데 특집 관계로 빠지게 되어 페이스북에 올립니다.     

‘여름’, 하면 노출의 계절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노출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입니다. 길에만 나서면 젊은 여성들의 적나라한 팔다리들을 자주 만납니다. 특히 요즘은 허벅지 노출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한때 ‘꿀벅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적당히 굵어서 건강미 넘치는 여성의 허벅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건강미를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조어법상 ‘섹스어필’의 의미가 우선하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꿀처럼 달콤한’ 성적 매력을 갖춘 허벅지라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자의 노출증과 그것을 훔쳐보는 자의 관음증이 의기투합한 ‘발칙한’ 조어법(造語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취향이나 관점에 따라서 다소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신체 중에서 가장 섹시한 부분으로 여기는 곳이 바로 허벅지입니다. 당연히 예부터 여성이 남성을 유혹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던 곳도 허벅지입니다. 옛이야기나 옛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빨래터의 유혹’은 십중팔구 빨래하는 아낙의 ‘허벅지 드러내기’로 시작합니다. 굵은 정맥이 살짝 내비치는, 두툼한 살집이 자라잡고 있는, 희고 투명한 그 속살에 성에 굶주린 남정네, 특히 길손들의 주린 욕정은 앞뒤를 가릴 수 없게 충동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래된 남녀상열의 이야기들이 빨래터나 우물가에서 종종 전개되는 소이가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여름이라 햇볕도 따갑지만 허벅지를 온통 드러내놓고 다니는 여자 사람들 때문에 시선 처리에 곤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빨래터도 아닌데 그 옛날 ‘빨래터의 유혹’을 너나없이 시연합니다. 다행스럽게 제가 딸을 키울 때는 그런 풍조가 없었습니다. 과년한 딸자식을 둔 지금의 부모님들은 그런 옷차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남의 딸자식에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저 색안경이나 끼고 못 본 척하는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꿀벅지’ 전성시대에 즈음하여 ‘유피테르(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박쿠스’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술의 신 박쿠스의 어머니는 카드모스의 딸 세멜레였습니다. 그녀는 대신(大神) 유피테르와의 사이에서 박쿠스를 임신하지만 아이를 낳기 전에 죽습니다. 질투의 여신 유노(헤라)의 계략에 빠져 유피테르에게 ‘유노 앞에 나타날 때처럼 제 앞에 나타나주길’ 소원한 끝에 벼락불에 타서 죽습니다(조강지처인 유노 앞에서는 늘 성질 험한 남편이었던 모양입니다). 평범한 아낙으로 변신한 유노가 그렇게 꼬드겼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나는 남자가 진정 유피테르라면 그의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해라, 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누구나 신인 척하니까, 그렇게 사주를 합니다. 순진한 세멜레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신들의 영역을 무심코 침범했다가 죽습니다. 유피테르는 이미 맹약의 신에게 세멜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맹세를 한 처지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연인을 죽게 만듭니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그녀의 아이는 아버지의 허벅지 안에서 나머지 성장 기간을 채운 뒤 태어나 박쿠스 신이 되고요. 신과 인간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천상의 에로티즘’을 넘보는 인간들이 감수해야 하는 ‘신의 징벌’을 봅니다. 세멜레는 ‘지상의 에로티즘’에 만족하지 못하고 ‘죽음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의 세계를 그 끝에서까지 맛보고 싶어 했습니다. 짐작컨대 그녀가 유피테르의 위의(威儀)였던 벼락불에 타서 죽는 순간 최상의 에로티즘을 엿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신의 본모습을 보여달라는 ‘신분 확인’ 절차는 명목상의 명분이었을 공산이 큽니다.     


세멜레가 죽음을 자초한 것도 바로 그 욕정의 불가항력적인 힘, ‘브레이크 없는 에로티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만이 천상의 에로티즘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결국 에로티즘을 추구하던 인간의 육체는 새카맣게 타서 죽습니다. 에로티즘이 햇볕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늘, 세멜레의 후예들이 삼삼오오 떼 지어 거리를 활보합니다. 제 몸이 작열하는 태양 열 아래서 새카맣게 타서 소멸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노출하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늙은 저는 그저 색안경을 끼고, 눈뜬 채로, 짐짓 눈을 감을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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