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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6. 2019

눈치 없이 산다는 것

이기적 삶

눈치 없이 산다는 것   

  

“제가 눈치가 좀 없습니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초면 인사 비슷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서로(‘서로’라는 말을 써도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지내게 되면서 그 말의 속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살 테니 상관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었습니다. 스스로 타인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하겠다는 것, 다소 물의를 빚더라도(도덕적인 비난에 노출 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 지나간다는 것, 자신이 욕심내는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놓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남들 일에는 가급적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이야 죽어나가든 말든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합니다. 가급적이면 많이 듣고 적게 말합니다. 꼭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이면 ‘참어라’, ‘잊어라’, ‘손을 떼라’, ‘욕심내지 마라’ 등과 같은 영양가 없는(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말만 해줍니다. 

경쟁에 관여하지 않으니 당연 군자입니다. 얼핏 보면 밉상일 것 같은데, 의외로 그이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를 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그만큼 ‘눈치 없는’ 사는 게 유리한 세상인 것 같습니다. 그이의 사는 모습에서 ‘눈치 없이’ 사는 것도 훌륭한 삶의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도 크게 보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눈치 없이 사는 것’과 ‘눈치 보며 사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이치를 공자와 노자(장자)의 말씀에서 찾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인정, 그 욕구의 강렬함과 의미의 파장 : 공선생은 하고 많은 주제 중에서 하필이면 왜 1장에서 인정(認定)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까?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 ‘인정 욕구(need for recognition)’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타자로부터 나의 가치를 공인받으려고 단순히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까지 불사한다. 내가 타인에게 모욕을 당하면, 즉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다양한 위기를 겪는다. 작게는 기분이 나쁘거나 감정이 상하는 정도이다. 심하게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허무감을 느끼기도 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무력감마저 느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모멸을 준 타자에게 시정을 요구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자살함으로써 가해(자)의 부당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공선생은 불인정에 대해 반작용을 하지 않고 못 들은 척 흘려버린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달팽이처럼 자기 세계로 들어갔다 빠져나와 자기 세계를 넓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동지가 찾아오는 것이다(有朋自遠方來). 그이와 만나면 동지가 두 사람이 되고 또 오면 세 사람이 된다. 이런 식으로 불어나 무리를 이루면 그것은 세상의 냉소를 버티는 바람막이이면서 세상을 바꾸는 진지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 그곳이 성역이 되고 해방 공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곳에 처량함과 쓸쓸함이 어디 있겠는가?

『노자』 80장에 보면 ‘적은 인구의 작은 나라(小國寡民)’가 소개된다. 그곳의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편안히 여기고 자신의 풍속을 즐기며, 이웃 나라가 저만치 서로 보이고 양쪽에서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태어나서 늙고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지 않는다”고 한다. 또 『장자』「대종사」에 보면 곤경에 빠진 물고기의 우화가 나온다. “샘물이 마르면 물고기가 맨땅에 서로 엉겨 붙어 몸을 비벼서 조금이라도 축축하게 하고 서로 물거품을 내뿜어서 적셔준다. 이것은 물고기가 드넓은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에 기대지 않고 사는 것보다 못하다.”

나는 어느 쪽이 옳다거나 낫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두 갈래 서로 다른 삶을 그려보자는 것일 뿐이다. 공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암울한 현실 세계에 책임을 느끼며 그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구원의 열망을 품고 있다. 이에 구원에 동참하는 이들을 찾아 서로 동지적 연대를 맺으려고 한다. 그이는 결코 인정을 넘어서서 세상에 대한 무관심, 소통이 막혀버린 절대 고독, 절대 고립에서 건져 올리는 비애감(비장함과 다름)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반면에 노 선생(노자, 이이)이나 장 선생(장자, 장주)에 따르면 각 개체는 방해가 없다면 자체적으로 진행되는 흐름이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참여는 화합과 융합이 아니라 교란이자 불안을 촉발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부당한 간섭이자 개입이기도 하고, 또 훼손이자 폭력이 되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공 선생은 공동체주의 성향이 강한 반면 노선생과 장선생은 개인주의 성향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이 결정적이거나 중요한데도 군자가 ‘불인정’ 앞에서도 성내지 않을 수 있을까? 군자는 타인에게 규정 당하기도 하지만 결코 타인의 평가 대상이 되지 않는 영역을 굳건하게 지닌다. 아울러 군자는 타인의 인정보다는 자기 신뢰, 즉 자신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처럼 군자가 자기 세계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한, 외적 평가에 휘둘리지도 일희일비하지도 않으며 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신정근,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중에서]     


언젠가 “남 앞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비석을 세우는 일과 같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꼭 글을 쓰지 않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비석을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삶의 도정에서 한 자 한 자 비석 위에 글자가 새겨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 돌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것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무거워 모든 걸 훌훌 털고 구름 위를 걷듯이 한 세상을 살겠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인 생각입니다. 너무 눈치 없는 짓입니다. 특히나 인생의 황혼기에 놓인 자들의 삶의 방식으로는 너무 미운 짓거리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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