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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26. 2019

죽은 어미 돼지의 변명

애태타 이야기

죽은 어미 돼지의 변명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중니(仲尼)에게 물었다. “위(衛)나라에 추남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애태타(哀駘它)라 합니다. 그와 함께 지낸 사내들은 따르면서 떠나지를 못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 분의 첩이 되겠다>고 부모에게 간청한다 하오. 그 수가 몇 십 명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오. 그가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걸 아직 아무도 들은 적이 없고, 늘 남에게 동조할 뿐이라오. 군주의 자리에 있어 남의 죽음을 구해주는 것도 아니요, 쌓아둔 재산이 있어서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니오. 게다가 그 흉한 꼴이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이며, 동조하기는 하지만 주장하지 않고, 지식은 사방 먼 곳까지 미치지는 못하오. 그런데도 남녀가 그 앞에 모여드는 까닭은 필경 범인과 다른 데가 있어서일 게요. 내가 불러들여 그를 만나 봤더니, 과연 그 흉한 꼴이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소. 그러나 나와 함께 있으니 한 달도 안 되어서 나는 그의 사람됨에 마음이 이끌리게 되었고, 1년도 안 되어서 그를 믿게 되었소. 나라에 대신이 없었으므로 나라를 맡기려 했더니,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응락했으니, 멍한 모습으로 사양하는 것도 같았소. 나는 부끄러졌으나 결국 나라를 맡겼소. 얼마 안 있어 내게서 떠나가 버렸소. 나는 뭔가 잃은 듯 마음이 언짢소. 이 나라에 즐거움을 함께 누릴 사람이 없어진 듯하단 말이오.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공자가 대답했다. “저는 언젠가 초나라에 사자로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돼지 새끼가 죽은 어미 젖을 빨고 있는 광경을 봤습니다. 얼마 후 돼지 새끼는 놀란 표정으로 모두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어미 돼지가 자기들을 봐 주지 않고,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미를 사랑한다 함은 외형이 아니고, 그 외형을 움직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싸우다 죽은 자는 그 장례식에서 장식 달린 관을 쓰지 않고, 발이 잘린 자의 신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모두 그 근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자의 후궁이 된 자는 귀밑머리를 깎거나 귀에 구멍을 뚫거나 하지 않습니다. 새 장가든 자는 집에서 쉬고 관의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외형을 온전히 하는 것만으로도 그처럼 될 수 있는데, 하물며 온전한 덕을 갖춘 사람이야 더욱 그럴 것입니다. 지금 애태타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신임을 얻고, 공적이 없는데 친밀해지고, 남이 자기 나라를 맡겨도 그것을 안 받지나 않을까 해서 염려할 정도입니다. 이는 필경 재능이 온전하고 덕이 겉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일 겁니다(是必才全而德不形者也).” [『장자』 내편, 「덕충부(德充符)」, 안동림 역주, 『莊子』 참조]


전통적인 해설(엄복의 <장자평>)에 따르면, 인용된 부분의 요점은 마지막 구절, ‘재능이 온전하고 덕이 겉에 나타나지 않는다(才全而德不形)’에 있다고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재(才)’는 하늘에서 준 것이고 ‘덕(德)’은 스스로 이룬 것이라고 할 때 ‘재전(才全)’이라 함은 천성이 외물(外物)로 인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애태타라는 인물은 그러한 ‘재전(才全)’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중니(공자)의 입을 빌어 내면의 근본을 중시할 일이지 겉으로 드러난 덕(德)에 이끌릴 일이 아니라고 설파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두 가지 반발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애태타라는 인물을 들어 ‘재전(才全)’을 설명한 부분에 선뜻 동조하기가 어려웠고요, 다른 하나는 돼지새끼들이 죽은 모체를 버리고 선뜻 떠난다는 예화가 잘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먼저 ‘돼지새끼들의 경우’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은 모체와 살아남은 새끼’의 예화는 공자가 ‘외형에 관계없이 근본이 없기에 쉽게 떠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확인되는 것입니다. 죽은 어미의 사체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새끼들도 많습니다. 그들 어린 생명들은 어미의 썩어지는 형체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근본’을 쉬이 잊지 못해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돼지새끼를 통한 우의(寓意)는 그리 용의주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애태타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실제로 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인물을 실생활에서도 종종 만납니다(친했던 친구 중에도 두어 명 있습니다). 섣불리 주장을 내걸지 않고 마지못해 동조하는 일에 능하며, 용모가 출중한 편도 아닌데 여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대인관계의 진정성과 의리관계가 분명히 확인된 것도 아닌데 주변의 호평을 받아내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을 괜찮은 축이라고 여깁니다(다만, 눈치가 좀 없다고 자백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까이서 그들을 겪어본 입장에서, 그들이 재전(才全)의 경지에 이른, 내적으로 덕이 충만한 인물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을 시샘해서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이 ‘자신에게 쏠리는 그 인정과 애정’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열이면 열, 그들은 예외 없이 그 ‘인정과 애정’을 즐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타인들로부터의 ‘인정과 애정’이 없는 삶을 그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애태타적인 삶’은 그들에게는 필생의 과업일 수밖에 없는 그 ‘인정과 애정’을 받아내기 위한 하나의 숙련된 기술(고육지책?)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일반적으로 그런 이들은 가정생활을 방치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프로이트식으로 보자면, 나르시시스트들이 흔히 취하는 위장 전술, 혹은 사회적 적응화의 한 양태이기도 한 것입니다.

장자가 말한 애태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진정 ‘재능이 온전하고 덕이 겉에 나타나지 않는 자(才全而德不形者)’였다면 그렇게 쉬이 사람들의 시야에 노출될 일이 없었어야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애태타라는 인물은, 못생겼지만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사랑할 수밖에 없는), 누구나 피해 가지 못할, 자기애(自己愛)의 한 대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유추가 맞는 것이라면, 장자의 애태타는 이상적인 인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우리 안의 한 인물에 대한 묘사였던 것입니다.


사족 한 마디. 사람이 사람을 홀리는(죄송합니다!) 일은 재(才)나 덕(德)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재나 덕으로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은 『장자』에서도 누누이 강조되고 있는 말입니다. 「인간세(人間世)」 편에서 안회와 중니를 등장시켜 시종일관 설파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남이 듣기 싫은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아라!). 이성적으로 누구를 존경(인정)한다는 것과 이유 없이(모르고) 누구를 좋아한다(따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그들은 다른 궤도 위를 달리는 두 열차와 같은 거였습니다. 그 두 열차를 한 줄로 세우겠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었습니다. 그 두 열차가 한 궤도 위에 오를 때는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는 궤도를 떠나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습니다. 부득불, 누군가로부터 인정이나 애정을 받고 싶은 사람은 그 둘을 교묘히(용의주도!) 분리시켜 운용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어미 돼지가 되거나(어미의 젖줄을 애타게 찾는 돼지새끼들!) 하다못해 돼지우리라도 되어야(누구든 더럽게 해서도 편히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은 죽은 어미 돼지의 변명이었으니 설혹 터무니없는 억측이나 못난 편견이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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