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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26. 2019

연분홍 벚꽃들이 화려한 군무(群舞)

태평양

그 친구 집으로 가려면 M고등학교 앞으로 난 좁은 축대길을 지나야 했다. 이제하 소설 「태평양」에 그곳 정경의 한 편린이 묘사되어 있다.


학교는 시(市)의 서북쪽에 있는 학산(鶴山) 비탈 숲 밑 양지쪽에 자리 잡고, 거의 전 시가지와 부두와 예배당 뾰족탑과 바다를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DDT 무더기가 본관과 별관 건물 모퉁이 이곳저곳에서 햇볕에 허옇게 타고 있었고, 그 귓속을 후비는 듯한 소독 냄새와 함께 채 깨지지 않은 유리창들이 대공(大空)을 향하여 눈이 시도록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제하, 「태평양」, 『초식』, 민음사, 1973, 36쪽)


동란이 끝나고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던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수업을 할 수 있었던 무렵의 풍경 묘산데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이 소설에서는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전망 좋은 자리에 터를 잡은 이 학교에는 정작 명물이 따로 있다. 축대 위 운동장 담을 따라서 열 그루 정도, 장엄히 서 있는 씨알 굵은 벛꽃나무가 그것이다. 아마 이 학교의 역사와 거의 같은 나이를 지닌 고목들이지 싶은데 이 벚꽃나무가 일제히 자신의 여린 살점들을 바다를 향해 날려 보내는 장면이 가히 장관(壯觀)이다. 장관인 건 알지만 누구나 수시로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정말이지 귀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몇 가지 조건이 제 때 갖추어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니 그렇다. 꽃 필 때 봄비가 자주 내려서 꽃잎을 미리 떨구어서도 안 된다. 낙화 시점에 때맞추어 산 위에서 바다 쪽으로 힘찬 바람이 불어줘야 한다. 그래야 꽃잎들의 화려한 집단 비행이 가능하다. 바람 부는 시간도 중요하다. 푸르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마음껏 쓸 수 있는 때여야 최고의 미장센이 가능하다. 그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그때 내가 바로 그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적인 용무로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몇날 며칠을 기다리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낙화 장면을 보려면 가히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그날도 친구집을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이었다. 친구집은 M고등학교의 높은 축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M중학교에서 M고등학교로 가는 길은 급한 오르막길이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 중이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새뗀가 싶었다. 무엇인가 살아있는 것들이, 반짝거리는 수많은 작은 날개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바다를 향해 떼 지어 날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바탕 삼아서 연분홍 벚꽃들이 화려한 군무(群舞)를 펼치고 있었다. 저렇게 일거에 지는구나. 시커먼 몸통에서, 어울리지 않게 매달려 있던 가여린 연분홍 살점들이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아 이렇게 세상이 아름답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왔다. 하늘은 눈이 시도록 맑았고 내 눈에서는 예고도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팥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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