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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9. 2019

왜 얼굴인가?

이콘과 아방가르드

왜 얼굴인가?


페이스북을 하다 보면 ‘얼굴’에 대한 공공연한 환대와 집착(?)을 종종 봅니다. 페이스북이라는 활동의 장이 본디 그런 인간의 심리를 기반해 만들어진 것인 모양입니다. 이름에 부응하듯이 볼만하든 않든 ‘얼굴 사진’만 올리면 ‘좋아요’의 숫자가 갑자기 폭증합니다. 남녀 불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얼굴을 내걸지 않은 사람들은 ‘친구 신청’에서부터 박대를 당합니다. 모두 얼굴을 중시합니다. 제 경우를 돌이켜봐도 조금이라도 좋아보이는 얼굴을 올리려고 고민할 때가 한때 있었습니다(요즘은 포기했습니다). 얼굴 사진이란 것이, 생각해 보면, 결국은 조작적 이미지에 불과한 것인데, 그래서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인데, 그렇게 우리는 얼굴에 집착합니다. 혹시 그것 속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요? 『이콘과 아방가르드』(이덕형, 생각의 나무)라는 책에서 몇 줄의 시사를 얻습니다.


....로마 시대의 초상화와 파이윰의 미라-초상을 거쳐 다시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폭넓게 확산되는 초상화의 장르는 개인의 페르소나를 대리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콘처럼 초월과 영원과 연계되는 상징적 연속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콘 파괴론자들이 두려워했던 바로 그 부재 증명의 그림 기호로 작동하고 있었다. 초상화는 새로운 이미지인 인물사진과 마찬가지로 결코 ‘보편적인 인간의 얼굴’로 환원할 수 없는 대상의 일회성과 지금 여기 없는 구체적인 얼굴을 환기시킬 뿐이었다. 가다머가 『진리의 방법』에서 말하듯이 초상화는 “보편적 존재자의 특수한 예”가 되는 것이다.<중략>  

그러나 초상화는 이콘이 지니지 못한 독특한 타자성, 즉 세속적 권력의 배타적 속성을 배경으로 지니고 있었다. 로마 황제들의 초상화처럼 이반 니키틴이 처음으로 그린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역시 편재하는 그의 권력을 대리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비록 초상화의 등장이 서구 유럽에서는 ‘근대적 개인individuum’의 탄생과 결부된 자기 성찰의 산물이기는 하지만(리하르트 판 뒬멘, 『개인의 발견』) 러시아에서의 초상화는 근대적 개인의 탄생이 아니라 근대적 절대 군주의 출현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초상화는 힘의 현전이었다. 특히 비잔티움 대신 서구 라틴 문화에 경도되었던 표토르 대제의 경우처럼 초상화의 얼굴은 보편적인 인간의 얼굴을 통한 무한과 초월의 내재화라기보다 코드화된 ‘권력의 시니피앙’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은 특정한 권력 배치의 산물이고, 그래서 “얼굴의 정치”(이진경, 『노마디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타자의 현현을 기다리는 ‘얼굴의 형이상학’인 이콘이 러시아의 맥락에서 초상화의 얼굴과 중첩되었을 때 이콘을 참칭한 파르수나나 초상화는 사제 아바쿰이 그처럼 격렬하게 비판했듯이 인신(人神)과 같은 우상의 속성을 내포하게 된다. 하지만 근대 초기에 들어와 이와 같은 얼굴들은, ‘현대의 이콘’으로 간주되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나 피카소의 ‘다중화된 얼굴’ 또는 마티스가 생폴드방스의 성당에 그린 ‘얼굴 없는 사제’의 모습처럼, 다시 ‘얼굴의 해체’(『노마디즘』)을 통해 ‘얼굴 없는 얼굴’의 디스토피아로까지 변형된다. 얼굴들의 유토피아에서 나와 너의 현상적인 얼굴들을 거치고, 마침내 해체된 얼굴들의 디스토피아의 세계로까지 전이되는 이 문화적 변전은 오히려 ‘전복된 성스러움’의 그로테스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외형(歪形, 비뚤어진 모양)의 얼굴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 『이콘과 아방가르드』(이덕형, 생각의 나무), 511~512쪽]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위의 글에서 얻을 수 있는 ‘얼굴(그림)에 대한 지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앞으로 좀 살펴볼까 합니다). 얼굴 그림(사진 포함)은 나의 기호, 보편적 실재, 자기 성찰, 권력의 현전, 초월적 표상 등등의 ‘기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얼굴에 대한 집착'으로서의 초상화는 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모든 집착이 그러하듯이 얼굴에 대한 집착 역시 변용(변태?)을 부릅니다. 신성이나 권력을 표상하는 얼굴에 집착하다가 종국에는 그것을 ‘왜곡’하거나(피카소) ‘해체’(마티스)하면서 만족을 느낍니다.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말미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인간의 ‘얼굴(그림이나 사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든 종교든 철학이든 장사에서든, 그것 없이는 자신을 보여줄 수도 과장할 수도 없습니다. 페이스북의 ‘얼굴’들이 오늘따라 더 유난해 보입니다.


<참조>
● 이콘 :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벽화나 모자이크, 목판 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그림
● 파이윰의 미라-초상 : 이집트 파이윰 지역의 미라 초상(미라의 관 위에 올려 져 있음)은 이콘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 파르수나 : 18세기 서구의 영향으로 이어진 파르수나 기법은 전통적인 이콘화와 사실주의적 초상화의 중간단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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