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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8. 2019

사람의 욕심

세우와 전륜왕

사람의 욕심


사람이 사는 일은 어쨌거나 욕심을 채우는 일입니다. 욕심 없이 산다는 말은 언제나 모순(어법)입니다. 남 보기에 ‘욕심 없이’ 사는 것 같아도 결국은 ‘욕심 없이 사는’ 그 욕심으로 사는 것이니 욕심 없이 사는 법은 없는 법입니다. 그나저나 사람 욕심 중에 가장 원초적인 것, 가장 지극한 것이 '사람 욕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입니다. 사람의 것인데 꼭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욕심을 내다보면 아주 끝이 없습니다. 편차도 큽니다. 어떤 이는 자신만을 위한 사랑을 하고, 어떤 이는 남을 위한 사랑을 합니다. 자기 한 몸에 그치는 사랑도 있고, 자기를 버리고 모두를 끌어안는 사랑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의 일인데도 왜 그리도 욕심내는 게 다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藏巧於拙 用晦而明 寓淸于濁 以屈爲伸 眞涉世之一壺 藏身之三屈也
(장교어졸 용회이명 우청우탁 이굴위신 진섭세지일호 장신지삼굴야)

교묘한 재주를 서툰 솜씨 속에 감추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드러내며, 청렴하면서도 혼탁한 가운데 머무른다. 이 모두 굽힘으로써 몸을 펴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것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안전한 길이요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삼굴이다. [채근담]

우리나라 배우 정우성과 홍콩 배우 양자경이 연상연하 커플로 열연한 『검우강호』라는 영화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영화 『검우강호』는 무협지의 몇 가지 공식, 이를테면 ‘불패의 가족주의’, ‘악의 토벌’, ‘발견을 통한 승리’, '해피 엔드' 등을 고루 갖춘 정통(고전적) 무협영화입니다. 인간은 결국 가족(원초적 사랑과 무조건적 유대)을 통해 구원된다는 주제와 약하고 선한 주인공이 만난을 극복하고(천신만고 일취월장, 조력자의 도움과 행운을 만나서 능력 배양) 끝내는 불패의, 강하고 악한 적을 굴복시킨다는 전형적인 무협 서사를 보여줍니다. 무협지의 기본 구성원리는 ‘발견을 통한 주인공의 승리’인데(약한 주인공이 어떻게 강해지는가가 핵심) 『검우강호』에서는 위에 인용한 채근담의 세 가지 처세의 요결(영화에서는 이굴위신도 독립된 자격을 얻어서 네 가지 비법이 시연됨)이 발견의 계기로 원용됩니다.

자신에게 무예를 전수한 전륜왕(轉輪王)을 물리치기 위해서 여주인공 세우(細雨)가 사용한 4가지 무예비법(藏巧於拙 用晦而明 寓淸于濁 以屈爲伸)이 바로 채근담에 나오는 그 세 가지 처세의 요결과 그 해석이었던 것입니다. 워낙 자연스럽게 등장해서 저는, 순진하게도, 그것이 고래(古來)의 무공비급에 나오는 구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예에 나름 식견이 있는 작가(혹은 무술감독)의 ‘근거 있는 창작’ 정도는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만큼 그럴 듯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전에서는 거리, 박자, 담력, 속도가 중요한데(一眼, 二足, 三膽, 四力), 앞서 든 예의 그 4가지 요결(발견의 계기)은 거리와 박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상대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기술의 운용'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장단, 곡절이라는 무기의 특성을 이용하기도 하고 대박자와 소박자, 그리고 엇박자를 이용하기도 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허허실실, 상대가 예기치 못한 기회를 만들어 내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그것을 타고 승부를 내는 '승리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전승이긴 했지만 그 담론이 여러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채근담에 의해서였습니다. 스스로 낮추어서 환난을 비켜가라는 가르침인데 그것을사람이 죽고 사는 대결의 생사관문에 갖다 붙인 것이었습니다. 입맛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재미는 있었습니다. 결국 다 한 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사는 이치가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어쨌든, 저에게는 '천장지구(天長地久)' 이래 최대의 ‘발견을 통한 승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 무예 비결에 대한 저의 소박한 궁금증은 일거에 해소가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용회이명(어둠을 이용해 밝음을 드러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글 쓰는 자의 공통된 욕심 중의 하나가 좋은 말이 있으면 어디든 갖다가 다시 내 것으로 써먹는 것입니다. 저도 원전(原典)의 장교어졸(藏巧於拙)을 가져다 장졸우교(藏拙于巧)로 바꿔서 써먹었습니다. 나머지 것들도 조금씩 ‘내 식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장졸우교는 ‘못난 생각을 기교를 써서 감춘다’라는 뜻으로 썼고 우청우탁은 ‘흐리고 맑음이 둘이 아니다’. 용회이명은 ‘어둠 속에서 빛은 빛난다’, 이굴위신은 ‘굽혀야 펼 수 있다’로 새겼습니다.

저는 그렇게 재미삼아 썼습니다만 『검우강호』에서 그것들이 사용된 문맥은 훨씬 의미심장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사족(蛇足)을 달아 보겠습니다. 불세출의 여자객(女刺客) 세우(양자경)는 암살집단 흑석파의 두목 전륜왕의 수제자입니다. 스승에 의해 살수(殺手)로 키워지는 그녀는, 그에게 복대검(腹帶劍), 일명 벽수검(碧水劍)의 용법을 전수받습니다. 검신이 얇아서 허리띠로도 쓸 수 있는 칼입니다. 가벼워서 여자가 쓰기에 알맞습니다. 검신(檢身)의 굴신(屈伸)이 변화무쌍하여 많은 고수들이 그 칼 아래서 하릴없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 흐르듯 유연한 벽수검법(碧水劍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단검에 약합니다. 길고, 휘청거리는 칼에는 짧고 단단한 단검의 단도직입(單刀直入), 변화무쌍(變化無雙), 자유자재(自由自在)가 치명적입니다. 작아서 상하의 움직임이 용이하고 짧아서 원간(遠間)을 요하는 긴 칼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공격의 기회를(거리를) 내주지 않습니다. 작은 고추가 맵습니다. 그걸 ‘발견’한 이가 세우의 첫 연인 지혜대사입니다. 소림사가 인정한 귀재, 무예의 천재, 지혜대사는 스스로 목숨을 바쳐서 세우의 회심(回心)을 이끕니다(그의 욕심은 ‘죽더라도’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우에게 그것을 깨는 네 가지 요령을 전수합니다. 그렇게 회심을 권합니다. 만약 회심하지 않고 살수로 나대다가는 언젠가 그 약점 때문에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때 그가 전수한 그녀의 벽수검법을 깨는 네 가지 비법이 바로 < 장교어졸 용회이명 우청우탁 이굴위신>입니다(작가가 그렇게 3분법을 4분법으로 만듭니다). 무기의 소용과 몸동작의 허실이 이루어내는 상호적인 작용과 상대의 박자를 깨뜨리는 요소요소의 기회(타이밍)를 그 네 가지 비결로 압축합니다.

새로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세우, 이제 강호를 떠나 행복한 한 가정의 주부로 살고 싶은 세우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전륜왕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의 야망과 야욕을 제압하고, 그의 마수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홀연히 강호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타협을 모르고 오직 전부 아니면 전무를 요구하는 절대악 전륜왕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던져 그를 이겨서 악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것이든 밖에 있는 것이든, ‘그놈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세우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륜왕은 세우를 만든 장본인이라 그에게 전수받은 솜씨로는 도저히 그를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벽수검법에 치명적인 하자를 심어놓은 것도 전륜왕이기 대문입니다. 길은 하나, 그가 가르쳐준 바로 그 벽수검법(碧水劍法)을 그가 쓰도록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의 자만과 방심이 스스로를 궤멸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역으로 그 약점을 파고들어 그를 물리쳐야 합니다.

거기서부터는 세우의 ‘발견’입니다. 세우는 전륜왕의 자존심을 긁습니다. ‘고추’도 없는 주제에 무슨 전륜왕이냐며 그를 조롱합니다(암흑가의 제왕 전륜왕의 정체는 말직 내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구를 넘어서기 위해 달마의 시신을 구합니다). 천지를 모르고 스승을 능멸하는 못된 제자의 버릇을 본때 있게 가르치고픈 스승은 제자의 칼을 뺏습니다. ‘네 칼로 너를 치리라’, 그렇게 용심을 부립니다. 제자가 모르는 걸 가르치고 싶습니다. 벽수검법의 극치를 써서 자존심도 회복하고 제자도 가르치고 싶습니다(스승은 늘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만과 방심은 무사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입니다. 거기서 전륜왕은 무너집니다. 세우는 남편(정우성)의 몸에 미리 꽂아둔 남편의 단검으로(남편은 장검과 단검을 같이 쓰는 이도류 검법의 달인이었습니다. 전륜왕을 속이기 위해 세우는 남편을 가사상태로 만듭니다)전륜왕을 궤멸시킵니다. 장교어졸, 용회이명, 우청우탁, 이굴위신이 차례차례 시연되면서 잔인하게 세상을 지배하던 거대악은 ‘발견의 진실’을 아는 자에 의해서, 가족을 통한 구원을 욕심내는 자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자신만을 사랑했던 ‘그 한 놈’은 결국 그를 죽이고 새 삶을 얻고자 하는 자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세우는 ‘그 한 놈’을 죽이고 세상을 새로 얻습니다. 전륜왕은 그렇게 제 욕심 안에서 쓸쓸히 사라집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제 욕심 안에서, 스스로 만든 자신의 틀 안에서 생명을 얻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욕심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치명적입니다. 밖에서 부는 바람은 옷깃을 여미어 막을 수 있지만, 안에서 곪아터지는 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욕심에는 나만을 위한 것도 있지만 남을 위한 것도 있습니다. “저는 돌다리가 되고싶습니다(我願化身石橋). 오백년 바람에 견디고(受五百年風吹), 오백년 비를 맞고(受五百年雨打), 오백년 햇볕에 쬐이고(受五百年日晒), 그렇게 견딘 후에 그녀가 저를 밟고 건너가기만을 원합니다.” 부처를 따르기로 맹세한 아난은 그렇게 자신이 발견한 ‘욕심(사랑)’의 경지를 설파했습니다. 그걸 알면 세우(細雨)고, 모르면 전륜왕(轉輪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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