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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7. 2019

망상과 간청

이콘의 의미

망상(妄想)과 간청(懇請)

새벽에 잠이 깨서 컴퓨터를 키고 앉았습니다. 꿈자리가 뒤숭숭했습니다. 한 가지 사실을 두고 아내와 다투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반드시 '엄마'를 부르고 죽는다.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다"라고 제가 떼를 썼습니다(조만간 곧 죽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평생 '엄마'라는 말을 입밖에 내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터인데 왜 꼭 '엄마'여야 하느냐? 떼쓰지 마라"고 저를 나무랐습니다(꼭 어머니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억울한 심사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왜 그렇게 세상 이치를 모르느냐",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니까, 엄마!" 그렇게 내지르면서 잠에서 깼습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찬 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종내 무거운 심사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참 어이없는 동물이라는 걸 또 실감했습니다.

오늘은 '망상과 간청'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실, 모든 생각은 한갓 망상(妄想)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항상 피해망상이나 과대망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출발점도 그것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생각하는 모든 인간들은 가여운 존재입니다. 모두 병들어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저를 대입해 보니 딱 들어맞습니다. 자신의 안위(安危)에 대한 지나친 집착, 인간과 기계 등 타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不信)들이 늘 저를 괴롭힙니다. 주변의 인간과 현상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 의심, 원망과 같은 '견강부회'에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분모는 작은데 분자가 늘 큽니다. 가분수(가분수는 다른 말로 가짜분수라고도 불립니다)의 해석과 유추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생각해 보니, 한 때 저도 생각께나 했습니다. 한 때 의심도 했지만 역시 프로이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생각 없이 살려고 노력하며 사는 요즈음, 문득 생각 많은 이들을 간혹 만납니다. 마치 옛날의 저를 보는 듯합니다. 아직 창창한, 나이 적은 이를 볼 때는 덜합니다만(그들은 언젠가는 개과천선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저처럼 나이 지긋한 이들을 볼 때면 측은지심이 입니다(그들이 겪는 것이 치욕, 심하게는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조악한 부품들로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젊어서는 잘 몰랐습니다.  


...성 루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성모 이콘의 유형은 분명치는 않으나, 성모와 세레자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데이시스’ 유형의 이콘(삼체 성상이라는 의미로 옥좌에 앉은 파토크라토르 형상의 그리스도 좌우에 성모와 세례자 요한이 있다)에 나타나는 성모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하기아 소피아 사원의 13세기 모자이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간청entreaty’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이시스 유형의 이콘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성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유형은 이콘 파괴 논쟁이 종료된 9세기 말 이후에야 나타나는데, 성모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의 첫 번째 증인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콘이 등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궁정 신하들의 간청을 받아들이는 비잔티움 황제의 위엄을 상기시키기 위해 도입된 이미지로도 볼 수 있는 이 데이시스 형상은 교회 내부에서 지성소의 ‘베마’(가장 거룩한 장소)와 신자들의 공간인 회중석 즉 나오스를 분리하는 ‘템플론’(성과 속을구분함과 동시에 하늘과 땅,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상징적 조형물)에 위치하며, 이콘 파괴 논쟁 이후에는 템플론이 발전한 ‘이코노스타시스’에서 중심적인 이미지가 된다. [ 『이콘과 아방가르드』(이덕형, 생각의 나무), 189쪽)


‘간청(懇請)’이라는 말을 보니 10년 전 쯤에 있었던 제 경험이 떠오릅니다. 어릴 때 잠시 가졌던 신앙에 미련을 두고 자칭 종교에 대한 ‘생각’만 열심히 할 때였습니다. 한 선배의 따님 결혼식에 참여했습니다. 대단지 아파트 촌 한 가운데 자리잡은 아담한 성당이었는데(사위가 러시아 총각이었습니다)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안 풍경이 무척 세속적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모인 하객들의 소란함이 미사에 집중하고자 하는 '늙은 돌아온 탕자'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총은 머리 위에서 도적처럼 내려왔습니다. 혼배미사 중에 성가대가 있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자비송’이 저를 크게 한 번 흔들었습니다. 멋지게 한 방 맞았습니다. 낮게 깔려서 저의 머리를 쓰다듬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가, 그 간절한 인간의 ‘간청’이 저의 심금을 제대로 울렸습니다. 아마 길 끝에서 결정적으로 제 모든 것을 앗아가는 선한 도적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간청’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생각, 온갖 집착, 온갖 욕심을 버리고 그저 신에게 간청하는 일, 자비를 비는 일, 그것만이 인간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 선택이었습니다.


문득, 발칙한 생각 하나가 들어옵니다(허황망상?). 신성을 증거하는 세상의 모든 이적(異蹟)들은 결국 ‘간청’의 빌미를 제공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손쉽고 편리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리라는 생각입니다(또 생각입니다. ㅠㅠ). 또 하나, 합리를 앞세운 이성(理性)도 결국은 망상의 일종에 불과한 것이리라는 생각입니다. 기껏해야 말입니다(이 또한 망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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