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글쓰기
“지구의 주인은 식물인 것 같다.” 십수 년 전에 가까운 지인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다 텃밭을 하나 마련해 두고 주말마다 농사를 지으러 다니던 이였습니다. 규모가 제법 큰 자두밭과 그 주변에 본인이 이런저런 작물을 많이 심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만 몇 해 못 가서 작파했습니다. 땅 주인의 힘을 능가하는 식물들의 완력을 당해내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잡초든 곁가지든, 본업이 따로 있는 주말농장 주인에게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농사일이었습니다. 눈으로 보는 식물과 내 ‘손’을 요구하는 식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화초들은 그런 의미에서 진짜 식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 땅의 주인임을 끊임없이 주장했습니다. 금전 몇 푼으로 문서 위에 땅의 소유자임을 적은 것만으로는 땅이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가짜 주인은 깨끗하게 손을 털고 물러났습니다. 새로운 땅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여태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말 농장에서 큰 실패를 보긴 했지만 그 지인에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뒤로 그분이 쓰는 글에서 전에 없던 알맹이가 하나씩 발견이 되었습니다(물론 제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쓰는 글과 모르면서 쓰는 글은 아무래도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자기애(自己愛)에 사로잡힌 글쓰기와 그것을 내려다보며 쓰는 글쓰기는 많이 다릅니다. 자신의 한계를 몸으로 깨친 뒤로 쓰는 글이 훨씬 단단하고 순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습니다. ‘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擴然而大公 物來而順應·확연히 크게 공정하여 만사 사물이 왔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 따를 뿐임)’이라고나 할까요? 비싼 수업료를 물기는 했지만 그 분의 정신활동에는 큰 도움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비슷한 내용이 연암의 ‘붉은 까마귀(赤烏)’ 이야기에도 나타납니다. 연암은 ‘약(約)과 오(悟)’를 통해 내 편협한 주관, 선입견, 고정관념을 깨라고 가르칩니다. 쉽게 깨달음을 얻지 못하던 제자가 가연(佳緣)을 만나 ‘붉은 까마귀’라는 형용 모순을 극적으로 넘어서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빛이 번지는가 싶더니 다시 석록(石綠)빛이 번지기도 하고,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에 어른거리다가 다시 비취색으로 빛난다. 그렇다면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테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터이다. 그 새는 본래 제 빛깔을 정하지 않았거늘, 내가 눈으로 보고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 먼저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다고 단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한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검은빛 안에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 빛이 다 들어 있는 줄을 누가 알겠는가.(설흔·박연찬,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로 사물을 설명합니다. ‘붉은 까마귀’라는 말을 모르고 있던 제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말로 그것을 설명하라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주문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말을 다 버리고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합니다. 혈기방장한 제자가 절세가인을 만나 정신을 잃을 정도의 미혹(공황상태)에 빠졌을 때야 비로소 ‘붉은 까마귀’를 본다는 것은 바로 그 ‘버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약(約)’(객관적 인식)이 ‘오(悟)’(깨달음)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허심포산(虛心抱山), 아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하다는 것을 몸에 새겨야 한다는 가르침으로도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