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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6. 2019

소년병

생활 전선

소년병(少年兵)


단어 중에는 그 자체로 습기(濕氣) 찬 것들이 있습니다. 젖은 수건처럼 돌려서 짜면 언제나 물이 나옵니다(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에서도 그 비슷한 표현이 나오지요). 그 단어를 만지다 보면꼭 언젠가는 눈물이 흐릅니다. 누구에게는 어머니, 누구에게는 아버지, 누구에게는 고향, 누구에게는 첫사랑, 누구에게는 조국, 그런 것들입니다. 소년병(少年兵)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도 멀리 신라시대의 화랑 관창이나, 6.25 당시의 학도병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대체로 혁명을 거쳐 나라를 다시 세운 곳에서 소년병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유명한 것이 옆 나라 중국의 ‘소홍귀(小紅鬼)’ 이야기입니다.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 항전을 읽고 한 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아마 그때 저에게 그만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오늘 아침 독서에서 소년병을 또 한 번 만났습니다.

오늘 아침에 만난 소년병 이야기는 배경이 좀 다릅니다.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의의 보상 없는 희생물로 14살 때 소년병으로 끌려 나갔던 82세의 모오리 히토시(毛利 平)씨 이야기입니다. 「검도시대(劍道時代)」라는 일본의 한 월간 검도전문지에 실린 것입니다. 그 책에는 존경받는 검도가(劍道家)나 검도 수행력이 있는 사회의 명사(名士)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말’이라는 표제로 한 말씀 듣는 코너가 있습니다. 권두 연재라 그 책 안에서는 비중이 나가는 지면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모오리씨는 명사의 자격으로 ‘한 말씀’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고령이지만 현역으로 활동하는, 현재 일본의 한 사립대학의 학장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는 총장입니다. 검도 실력은 교사(敎士) 7단, 전문 검도가가 아닌 이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이였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말은 ‘여수(如水)’입니다. '물과 같이‘라는 뜻입니다. 14살 때부터, 공습으로 졸지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학도 출진(學徒出陳),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총알받이 소년병으로 참전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근 70년을, 그는 그 말에 의지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물은 항상 자신의 진로를 찾아 멈추지 않는다.
2. 물은 자신의 활동으로 남을 움직이게 한다.
3. 드넓은 바다를 채우는 것도 물이요, 영롱한 것도 물이다. 그 본성에 변함이 없다.
4. 물은 자신도 더러워지면서 남의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5. 장애물을 만나면 격하게 자신의 힘을 키워 극복해낸다.

물이라면 의당, 상선약수(上善若水)나 명경지수(明鏡止水), 아니면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식의 ‘높거나 깊은(?)’ 의미로만 생각해 온 사람들로서는 오히려 생경한 물의 의미였습니다. 저는 그의 좌우명을 대하는 순간 모종의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앞서 든, 물의 이른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의미가 아니라 그야말로 물성(物性) 그 자체에서 추출한, ‘형이하학적인’ 교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 네 살의 차원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진한 소년기 관념이 평생을 두고 한 인간의 행로를 안내했다는 게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좌우명을 보는 순간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아버지에게서 그런 식의 ‘형이하학적인 것에 대한 존중감’을 줄곧 보아왔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식민지 하급 지식인들의 특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범학교, 상업학교, 농업학교, 공업학교 등 식민지 고등교육을 담당했던 직업학교들이 만들어낸 인간 유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능적 지식인 양성’의 한 결과일 수도 있었습니다. 식민지 교육은 창의적인 사고활동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자기실현보다는 주어진 과제에 성실하게 매진하는 도구적 인재 양성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저희들은 그런 ‘기능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키워진 어중간한 세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런 ‘형이하학적인 태도’는 제게는 일종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식민지 때 학창 시절을 보낸 아버지 세대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의 활용’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생활상의 모든 면에서 교훈을 찾는데 능숙했습니다. 지금 와서 정리되는 것이지만 그들 아버지 세대들은, 배운 사이라면 항상 공동체를 위한 마음을 먼저 내세우고(공중질서 존중), 절차탁마(切磋琢磨)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늘 자신을 닦는 생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생활신조로 삼기를 강박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그저 ‘알고 있는’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강박으로 가지고 살기를 강요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인간형’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어릴 때 겪은 ‘아버지의 삶의 태도’를 다시 이렇게 만나다니, 그 감회가 좀 이상야릇했습니다. 무언가 무궁무진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는데, 살아보니 인생은 어차피 조롱(鳥籠) 같은 것, 나는 그 안에 갇혀있는 한 마리 작은새에 불과했다는 허무감마저 들었습니다.

모오리씨는 물의 물성(物性)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쿠로다(黑田如水)라는 이가 남긴 ‘수오(水五)’라는 교훈이라는데, 그 다섯 가지 교훈이 모두 어린 용사(勇士)에게 필요한, 자기수양과 희생, 용기와 개척정신을 북돋우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스스로는 누가 강요해서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전기(傳記)나 군기(軍記) 등을 읽다가 얻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 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로 작용하던 모종의 이데올로기였던 ‘형이하학적인 것에서 배워라’의 소산이었습니다. 기특한 소년병이었습니다.

사실은 저도 소년병 출신입니다. 누구처럼 ‘최후의 빨치산 소년병’이 아니라 엄혹한 생활전선(生活前線)의 소년병이었습니다. 어려서는 하루하루를 가혹한 전쟁터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는 ‘비록 오늘 전투에서는 패할지라도 내일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을 무언의 신조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남루와 수치, 비굴과 배신을 밥 먹듯이 겪고 행하며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했습니다. 모오리씨의 ‘물’ 같은 것도 책상 앞에 많이 붙여야 했습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면 역풍을 순풍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위기는 항상 기회다’ 정도가 아직도 생각나는 그럴듯한 좌우명입니다. 고등학교 때 써서 붙인 것입니다. 모두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의 소산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내가 더러워지면서 남을 씻어내는’ 물의 경지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인지 알지만 문득, 그런 때늦은 후회가 들기도 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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